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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Jan 29. 2021

오뎅 단상(斷想)

오뎅에 관한 에피소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어느 고등학교에서 미술 필기시험이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뒤에 평소 공부에 담을 쌓은, 뒤에서 1,2등을 다투는 학생 둘이 있었다. 객관식 문제를 풀다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을 만든 프랑스 조각가 이름이 무엇인지를 묻는 주관식 문제가 나왔다. 당연히 우등생은 망설임 없이 '로댕'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공부를 등한시한 두 학생은 정답을 알 리가 없었다. 객관식이야 연필을 돌려서 찍으면 될 일이었지만 주관식은 그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선생님의 감시를 피해 앞에 있는 우등생 친구가 쓴 답을 어깨너머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로댕이라고 쓴 글씨를 언뜻 보는 바람에 오뎅이라고 잘못 표기하고 말았다.

반등수가 도찐개찐인 그 친구 뒤에 있는 꼴찌를 다투는 다른 친구도 오리무중인 상태.. 이번엔 이 학생이 오뎅이라고 답을 쓴 친구의 답을 어깨너머로 보게 되었다. '정답이 오뎅이었어? 이렇게 쉬운 문제를 내다니..' 오뎅이 정답인 걸 확신한 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나 똑같이 쓰는 건 뭐해서 나름대로 알고 있는 어휘력을 발휘하여 답을 썼다. 그가 쓴 답은 바로 '뎀뿌라'였다.

요즘은 어묵이라는 우리말로 통용해서 사용하지만 예전엔 어묵을 '오뎅' 또는 '뎀뿌라'라는 일본식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었다. 오뎅이라는 용어를 아직도 사용하는 가게를 종종 보게된다. 나조차도 어묵보다는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오뎅이 더 친근감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부모세대들이 슬리퍼를 쓰레빠, 양동이를 바께스라고 여전히 일본식 용어를 익숙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대가 변해도 세대를 아울러 바뀌지 않는 몇 안 되는 간식 중 하나가 오뎅과 떡볶이가 아닐까 싶다. 쌀이 귀했던 시절엔 밀떡볶이가 주를 이루었다. 나는 지금도 식감이 부드럽고 씹기 편한 밀떡볶이를 좋아한다. 신당동 떡볶이집이나 우후죽순 생겨나는 체인점 떡볶이집도 길거리에서 파는 그 맛에는 못 미친다. 떡볶이에 찰떡 궁합이라 할 수 있는 오뎅도 마찬가지다.


길거리 포장마차


오뎅하면 뭐니 뭐니 해도 길거리에서 파는 오뎅꼬치를 빼놓을 수 없다. 반포동 고속터미널 맞은편 골목 사우나 건물 앞에는 내가 가끔 들르는 오뎅과 떡볶이를 파는 리어카가 있다.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최고의 떡볶이와 오뎅의 맛을 자랑하는 그 집은  40대 후반의 젊은 중년이 장사를 하고 있다. 내가 그곳을 알게 된 지도 벌써 13년이나 되었다. 한 번은 친한 형님이 자주 다니는  사우나를 따라갔었고, 사우나에서 땀을 쭉 빼고 난 후 먹는 떡볶이와 오뎅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얼마나 맛이 있으면 집에서 이곳까지 차를 타고 한 시간은 족히 걸림에도 일부러 이곳을 찾을 정도니 말 다하지 않았는가.

내가 그 집 오뎅과 떡볶이에 홀딱 반하게 된 이유는 어릴 적 만화가게에서 먹었던 그 맛을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큼지막한 가래떡을 철판 위에 넣고 고추장과 흑설탕으로 버무려 만드는데 주인 양반한테 맛의 비결을 물어보니 양념의 비율이라고 하였다. 거기에다 길쭉한 오뎅꼬치와 얼큰한 국물의 조합은 추운 겨울을 잊게 하는 환상의 주전부리 궁합이라 할 것이다. 오뎅맛의 비결도 물론 육수에 있었는데, 이집은 무, 대파, 고추 외에 특이하게 꽃게를 넣어 알싸한 맛의 깊이를 더한 게 특징이다. 초등학교 앞에 있는 터라 코흘리개 초등학생들이 주 단골손님이지만 이 맛에 길들여진 어른들도 이 집 음식 맛에 중독되어 즐겨 찾는 바람에 금세 동이 나고 만다. 낮 12시쯤 시작해서 오후 6시면 하루치 양을 다 팔아버린다.

내가 뜬금없이 오뎅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오늘 인터넷 뉴스 기사에 눈살을 찌푸릴만한 장면이 실렸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의 식상한 쇼맨십, 다름 아닌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먹는 장면이었다. 뭐 정치인들이라고 오뎅을 먹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만은 선거 때만 되면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니 식상하기 그지없었다.

민생은 뒷전이고 평소엔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재래시장은 얼씬도 안 하는 고상한 분들이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 순대 오뎅 붕어빵 호떡 등 서민이 즐겨먹는 길거리 음식을 먹고, 언론은 또 그 장면을 사진을 찍어 보도하는 걸 보노라면 참으로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갖는 게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정치인들이 서민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여 그가 서민의 애환을 공감하는 정치인이라고 생각할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젠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서민 곁에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재래시장을 찾지만 이런 '보여주기식 정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어여삐 여기는 가식적 행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걸 왜 모르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이젠 그런 어설픈 쇼맨십은 그만하고 서민들의 현실적인 아픔과 애환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헤아릴 줄 알았으면 좋겠다. 상인들은 매상이 반이상 줄어 월세도 못 내고 가게를 닫아야 하는지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고민한다고 한다. 서민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나가는 게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불안함의 연속인 일상을 눈물을 머금고 살아간다. 제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표심을 얻기 위한 일시적인 쇼맨십이 아니라 험난한 이 고비를 헤쳐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서민을 위한 정책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함께 공감하고 공생할 수 있는 그런 정치를 해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바라건대, 앞으로 나라의 녹을 먹는 고명하신 모든 분들은 내 추억이 서려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거리 음식에 먹칠하는 행동은 삼갔으면 좋겠다. 특히 오뎅만큼은 절대로 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분명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꼴불견으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래도 굳이  먹어야겠다면 부디 오뎅을 먹을 때 프랑스 조각가 로댕을 떠올려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로댕의 대표작 <생각하는 사람>처럼 무엇이 서민을 위한 일인지 생각하는 정치인이 되어주기를 진정 바라 마지않는다.  (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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