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바탕으로 인터뷰이의 시점에서 필자가 1인칭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 세상에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몇 개 쯤 될까. 정확한 답을 알 순 없지만, 누구든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이제 내가 써내려 갈 이 글도 그 수많은 이야기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뿌연 연기에 둘러싸인 정체 모를 무언가가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리고 나는 그 무게감에 꼼짝없이 붙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안개는 다 걷히지 않았다. 나조차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이유를 몇 가지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안개에 가려진 것 중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쯤은 알 수 있다.
나한테 영향을 미친 중요한 경험들을 되짚어보면 항상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내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다. 제일 오래된 기억은 엄마와 관련된 기억이고 최근 감정을 어지럽혔던 원인도 엄마와의 사소한 대화였다. 돌이켜보니 내 삶에서 엄마와 무관한 건 몇 개 없었다. 대체 엄마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 걸까? 엄마가 특별히 나쁜 사람인 것도, 엄마를 둘러싼 상황이 특수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내가 엄마 때문에 힘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지금도 명확한 건 없다. 어쩔 땐 엄마가 원망스럽지만, 어쩔 땐 측은하다. 분명 나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많이 남겼는데 그럼에도 엄마를 싫어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이 글을 다 쓰면 조금은 선명해질까?
나에게 ‘우울’이라는 단어만큼 익숙한 것도 없다. 우울한 감정을 몰랐던 나를 떠올리기도 어렵다. 마치 처음부터 이랬던 것처럼 나는 당연하게 우울하다. 익숙한 것과 적응되는 것은 별개다. 아무 문제없이 지내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우울감이 밀려올 때면 나는 너무나 쉽게 나락으로 이끌린다.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경험치가 쌓였고 많이 나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나락으로 이끌려도 지하 저 끝까지 가는 기분은 아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에는 지하 저 끝에 닿았다. 아니, 거기에 붙어서 지냈다.
어느 정도 자라면 누구나 1인분의 밥값을 요구받는다. 성인을 기점으로 앞으로 이 세상에서 내가 수행할 역할에 대해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주변부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던 우울감이 갑자기 몸집을 키워 나를 집어삼켰던 그 시절, 나에겐 증명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살아야만 하는, 죽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분명 나도 어릴 땐 죽음이 무서웠을 텐데 그 시기에는 죽음이 가장 안락한 쉼터처럼 느껴졌다. 그 무엇에도 적응하지 못해 결국 집으로 도망쳤지만, 이 집에서마저 나는 혼자 동떨어진 존재였다.
수시로 응급실에 갔다. 항상 피해자는 나였고 가해자도 나였다. 오래 전부터 난도질당해 무뎌진 감정 대신 아직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몸을 괴롭혔다. 매번 나와 응급실에 동행해야 했던 엄마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당신을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그에 그치지 않고 죽음에도 손을 뻗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중환자실이었다. 입원해있는 동안 면회 온 엄마는 항상 울다 지친 얼굴이었다. 그 이후로 내가 나를 해칠 때면 엄마는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왜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미안한데, 엄마.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그걸 알았더라면 이러지 않았겠지.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그때 내 머릿속엔 뇌 대신 먹구름이 있었다. 비를 잔뜩 머금은 채 온 세상의 어둠을 드리우는, 그러면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먹구름.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다. 나는 이유를 탐구하기는커녕 아예 없다고 단정 짓고 절망했다. 그러면서 이유 없이 혼자 엇나가는 내 존재를 자책했다. 이제는 안다.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라 몰랐다는 것을, 이유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울던 그날에도 있었다는 것을.
정확한 경위는 다 잊어버렸지만, 감정만은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까마득히 먼 옛날, 어린 나는 엄마와 크게 싸웠고 감정을 주체 하지 못해 집을 나왔다. 왜 싸웠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별 것도 아닌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애타게 공중전화를 거는 내 모습만은 선명하다.
갑자기 공중전화 수화기를 든 건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당장이라도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죽은 엄마를 마주할 것 같아 두려움에 울면서 전화기만 붙잡았다. 그때 그렇게 건 전화를 누군가 받았던가? 받아서 뭐라고 했던가? 나는 말했던가? 어쩌면 누구도 듣지 않는 불안을 혼자 쏟아낸 건 아니었을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엄마는 죽지 않았다.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고 지금도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그때 그 감정은 가끔씩 떠올라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많은 일을 겪은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보니 그날의 경험은 우리 관계의 핵심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집을 뛰쳐나왔을 만큼 분노에 사로잡힌 순간에서조차 그 어린 애가 자신의 감정보다 엄마의 감정을 먼저 걱정했다는 것. 그것만으로 내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를 설명할 수 있다.
항상 나는 엄마의 감정이 더 중요했다. 엄마가 기쁘면 기뻤고 엄마가 불안하면 나도 불안했다. 나의 감정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엄마 말로는 어렸을 때 나는 몹시 예민한 아이였단다. 아주 사소한 변화도 곧바로 감지했고, 익숙한 것이 아니면 크게 울어대곤 했단다. 하지만 그 예민한 아이는 적어도 공중전화 부스에서 울기 전에 사라진 게 분명하다.
한국 사회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지닌 어떤 숭고함이 있다. 그런 숭고한 존재 밑에서 자란 자식들은 항상 엄마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며 자란다. 엄마가 나를 낳아주고 키워줬다는 사실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금전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적지 않은 소모가 있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태어난 건 내 의지가 아니다. 나는 그저 당신들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이 차가운 세상에 당도한 것뿐이다. 그런데 왜 엄마는 마치 내가 당신을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굴었던 걸까. 난 그저 이 삶을 견뎌내기에 너무 나약했을 뿐인데.
질풍노도 같던 사춘기 시절, 나도 남들처럼 엄마와 자주 싸웠다. 그러나 그 싸움의 강도는 남들과 같지 않았다. 분명 시작은 방청소 같이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었는데, 그 끝은 항상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파국이었다. 상대가 죽어야 끝나는 중세시대의 결투도 그만큼 처절하진 않았을 것이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구원을 주고받는 서사가 많이 등장하던데, 우리는 각자가 지닌 상처로 상대를 공격하기만 했다. 나의 고통은 엄마를 괴롭혔고 엄마의 아픔은 나를 죄책감에 가두었다. 싸우고 나면 엄마는 우울해했고 나는 반성했다. 우울과 반성의 굴레는 무의미하게 반복됐다.
전쟁 같은 갈등 시기가 지나고 수많은 일을 겪고 난 뒤에야 엄마에게 지난 일을 되돌아 볼 여유가 생겼다. 엄마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저지른 과오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당신을 괴롭힌다고 믿었다. 나는 그 믿음이 가증스러웠다. 어떤 상황이든 “그래, 이게 다 내 탓이지”라고 끝맺는 자책엔 반성이 아니라 포기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컷 원인을 제공해놓고 이제 와서 푸념하는 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다 과거로 탓을 돌리면 앞으로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가. 그렇게 무책임한 태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게 만약 엄마의 업보에 의한 거라면 왜 나까지 고통스러워야 한단 말인가. 내 업보는 무엇이란 말인가.
엄마에게 상처받았다는 말을 입에 올리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부 좋은 추억에 가려져 ‘그래도 엄마니까’라는 생각에 최대한 그녀를 좋게 생각하려고 했다. 그 노력의 반만이라도 나를 보듬어줬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뒤늦게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두서없이 인생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특별히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상담 선생님은 많이 힘들었겠다고, 내가 그런 일을 겪은 게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처음엔 그 말을 온전히 믿기 힘들었다. ‘이게 힘든 일인가?’ ‘이게 슬픈 일인가?’ 같은 의문만 떠올랐다. 그러나 쉽게 진실을 왜곡하는 감정과 다르게 눈물은 정직했다. 분명 별 것도 아닌 일인데, 나한텐 너무나 익숙한 일인데 최대한 덤덤하게 말해도 눈물이 났다.
상담은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엄마의 감정에 예민하다는 것. 우리 사이가 일반적인 모녀 사이와는 다르다는 것. 내가 겪은 일이 절대 가볍지 않았다는 것. 감정이 없었던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감정을 느껴서 지워버린 거라는 것…. 상담 선생님의 반응으로 깨닫기도 했고, 내가 말하면서 스스로 깨닫기도 했다.
신체 질병의 원인 중 유전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 이는 정신 질환도 마찬가지다. 나의 우울은 엄마가 남긴 유전이었다. 누군가에게 우울증은 감기처럼 지나가기도 한다던데, 본래 예민한 성향이었던 엄마에겐 그렇지 않았다. 상처 난 자리에 소독약을 바르면 따끔거리듯이 우울증은 엄마의 예민한 마음에 너무나 쉽게 생채기를 남겼다, 나는 그 사실을 고스란히 느끼며 성장했고, 그렇게 엄마의 우울은 곧 나의 것이 되었다.
상담이 내게 안겨준 가장 커다란 가르침은 엄마와 내가 분리된 존재라는 점이었다. 내 감정의 주인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아무도 내게 그렇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실 누가 가르쳐줬더라도 분명 나는 엄마의 감정에 똑같이 예민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그래도 인지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르다. 만약 내가 그 점을 인지했었더라면 엄마의 노골적인 감정 표현 앞에서 조금은 침착했을지도 모른다.
엄마에게서 나를 분리시킨 것과 별개로 엄마를 전보다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내게 남긴 상처는 결코 고의가 아니었고, 엄마도 나만큼 나약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자주 내뱉던 본인도 힘들다는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여기서 확실히 밝히고 싶은 건, 이해와 용서는 엄연히 다른 말이라는 것이다. 엄마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해서 내가 받은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동안 나는 많은 개념을 동일시했다. 이해와 용서를 동일시했고, 죄책감과 애정을 동일시했고, 엄마와 나를 동일시했다. 그것들이 모두 분리된 채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훨씬 더 많은 삶의 진실을 볼 수 있었다.
나처럼 가장 든든해야 할 집에서 상처받은 존재를 만난다면 그저 말없이 안아주기만 할 것이다. 말을 보태는 자체가 누군가의 상처를 함부로 단정 짓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가장 애타게 바란 것도 말없이 안아줄 누군가였을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면 그럴듯한 교훈으로 끝맺곤 하는데, 나는 그런 교훈을 찾지 못했다. 애초에 교훈 따위를 얻으려고 힘들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하고 싶은 말을 찾자면 모든 모녀 관계가 이상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 이정도이겠다.
이 글이 당신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 자신을 향한 자기 고백에 가까운 글이니까.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내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공감한다면, 그런 당신을 말없이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만 알아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