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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금미 Jun 07. 2022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원하는 운명을 믿는 것-하데스타운


운명이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된다. 운명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2. 앞으로의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


우리가 주로 쓰는 운명은 1번 의미에 해당한다. 너무나도 나약한 한낱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어쩔 수 없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면 지독한 운명론이 떠오르고 ‘이 모든 것은 운명에 맡기자’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이 운명을 부정해왔다. 신을 믿지 않아서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의 형태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할 때 점집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미래를 묻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운명 따위는 없으며 미래는 오로지 나만이 개척하는 것. 나는 나의 이러한 신념이 내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해줘 퍽 맘에 들었다.


그런데 함정이 있었다. 미래는 오로지 나만이 개척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모든 결과의 책임이 오로지 나에게만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분명 착하게 살았고 노력까지 했는데도 바란 적 없는 의외의 결과들만이 쏟아졌을 때 내가 택한 원망의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내가 노력이라고 믿은 건 노력도 아니었다고, 이 정도 변수도 예상하지 못하다니 멍청하다고. 경험이 쌓이고 지혜가 축적되면 의외의 결과를 마주할 일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거라 믿었지만, 나는 여전히 변수투성이 세상에 살고 있다.


어린 날의 패기는 내려놓고 운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운명이 정말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뜬구름 같은 개념일 뿐인 걸까? 정말 존재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내가 마주한 모든 결과가 모두 내 책임이 아닌 건 아닐까?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아직도 삶이 어렵기만 한 미숙한 내가 저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렇게 수많은 질문을 끌어안은  수수께끼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나는 거대한 운명의 벽에 부딪힌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 바로 뮤지컬 <하데스타운> 주인공 되시겠다. 그들은 내가 고민하던 것처럼 운명을 부정하든지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든지   하나의 길만 선택하지 않았다.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있는 최선의 발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가시밭길이 예견되는데도 오르페우스의 사랑을 받아준 에우리디케와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달려간 오르페우스는 내가 암담한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떠오르곤 했다. 그들을 생각하면 앞길이 캄캄한  현실 속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있었다.





필자는 <하데스타운>을 2021년 11월, 2022년 1월 그리고 2022년 5월, 이렇게 총 세 번을 관람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관람 후기를 작성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거창한 후기를 써야 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본 작품을 소개하고 어떤 부분이 좋았고 어떤 메시지를 느꼈는지, 이 정도만 가볍게 SNS에 업로드해도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하데스타운>에 대해 얘기한다면 꼭 거창한 담론을 완성하고 싶었다. 나에게 이 뮤지컬은 극 자체로도 할 말이 많지만 극장에서 나와 현실과 접목했을 때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떠오르는 극이기 때문이다.


<하데스타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페르세포네의 부재로 일찍 겨울이 찾아온 인간 세계, 오르페우스는 봄을 되찾을 노래를 완성하는 데 매진한다. 한편 오르페우스가 노래를 만드는 사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에우리디케는 하데스의 꼬임에 넘어가 하데스가 관리하는 지옥, 하데스타운으로 가게 되고 이를 뒤늦게 안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시작하는데….


<하데스타운>은 우리에게 친숙한 두 개의 신화를 모티프로 삼았다. 하나는 하데스가 페르세포네에게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지옥에 데려가자 인간 세계에 차가운 겨울이 도래했다는 신화고, 다른 하나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하데스가 관장하는 지옥에서 데리고 나오려 했지만 데려가는 동안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라는 조건을 어겨 실패하게 되었다는 신화이다.


두 개의 신화는 극을 끝까지 이끌어가는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구하는 과정 자체가 이 이야기의 큰 줄거리이고, 그 과정에서 오르페우스가 ‘Epic’이라는 넘버로 읊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사랑 이야기가 이야기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친숙한 신화가 바탕을 이루는 덕에 처음부터 난해하거나 낯설다는 인상 없이 마음 편하게 극을 따라갈 수 있다.


오르페우스를 설명하는 단어를 꼽자면 단연 ‘이상주의자’일 것이다. 현실의 풍파에 지칠 대로 지친 에우리디케에게 가진 것도 없이 대뜸 청혼한 것도 모자라 집도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묻는 그녀에게 자신이 노래를 완성하면 자연이 감동해서 집도 먹을 것도 마련해 줄 것이라고 말하는 허황된 사상의 사나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오르페우스의 낙관을 현실적인 성격의 에우리디케가 받아들이는 모습이 개연성이 없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혼자 있을 땐 가혹한 운명에 비관만 하던 에우리디케였지만 오르페우스의 천진난만한 꿈을 비웃지 않고 그가 봄을 부를 완성하기를 믿고 지지한다. 오르페우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미완의 상태인데도 그가 노래를 부르자 곧바로 피어나는 장미 한 송이가 그 증거다. 너무나도 명확한 증거지만 혹독한 세상에서 노래 만들기에만 매진하는 배우자를 믿고 기다려주기엔 장미 한 송이는 너무나 연약하다. 에우리디케가 그 장미 한 송이에 오르페우스에게 운명을 건 건 그녀가 순진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믿음에 장미가 10% 정도 기여했다면 나머지 90%는 그를 믿고 싶은 그녀의 의지다.


그렇지만 그 의지만으로 매서운 추위를 이겨낼 수 없다. 결국 시련에 굴복한 에우리디케는 하데스의 꼬임에 넘어가 하데스타운으로 향하게 되는데, 하데스타운은 전형적인 지옥에서 벗어나 산업혁명 이후의 공장의 모습을 띤다. 익숙한 신화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적인 해석을 가미한 뮤지컬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지옥의 신 하데스는 악덕 고용주의 모습을 하고 페르세포네가 머무는 동안 활기로 가득 찼던 인간 세계에선 자유롭게 움직이던 이들도 하데스타운에선 똑같은 옷을 입은 채 무표정으로 단순 노동만 하는 일꾼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건 꼬임에 넘어간 에우리디케도 마찬가지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커다란 문명의 발달을 안겨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인권이 박탈당하거나 심각한 환경 파괴가 진행되는 등 커다란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한다. 하데스타운의 세계는 자본주의의 단맛은 기득권인 하데스만 향유하고 다수가 그 부작용을 감수하는 현대 사회의 축소판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도가 명확한 이 공간에서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온 오르페우스의 등장은 몹시 이질적이다. (사탄의 학교에 루시퍼의 등장이랄까)


오로지 노래를 무기로 하데스에 맞서는 오르페우스는 마치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과 같다.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는 오르페우스가 감히 하데스에게서 에우리디케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신화의 결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가 설령 하데스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해도 결국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를 놓치고 만다는 그 결말을 말이다.


뮤지컬에서도 마찬가지로 의심의 목소리에 괴로워하던 오르페우스는 결국 널리 알려진 대로 뒤를 돌아보고 만다. ‘뮤지컬은 다르겠지’라고 생각하며 애원하던 나는 신화와 같은 결말이 펼쳐지자 허망한 심경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침 내가 앉은 자리에서 놀라면서도 허탈한 에우리디케의 표정이 너무 잘 보여서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전혀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흘러가자 허망한 심경을 서둘러 주워 담았다. 루프물. 그러니까 <하데스타운>은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반복되는 구조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가는 오르페우스는 계속해서 떨어지는 돌을 올리려 하는 시시포스처럼 어차피 실패할 운명의 일을 헛되이 반복하는 사람일 뿐일까? 결과적으로 달라진 건 없으니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분명 무언가를 변화시켰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시키는 대로 일하던 일꾼들에게 저항의지를 심어주었고, 차가운 현실에 비관하던 에우리디케에게 장미 한 송이 같은 희망을 심어주었고, 해설자 헤르메스에게 결말을 알면서도 이번엔 다를 거라 믿으며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삶의 태도를 알려주었다.


<하데스타운>은 관람을 거듭할수록 이야기의 규모가 점점 더 확장되어 다가오는 작품이다. 처음엔 단순히 사랑 이야기로 느껴졌다가 두 번째엔 희망 그 자체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가장 최근에 이뤄진 관람에선 불의에 저항하는 모든 소시민을 격려하는 극처럼 느껴졌다.


의심을 이기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정말로 따라오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숨기지 못한다. 내게 큰 허탈함을 주었던 그 장면은 마지막 관람에선 묘한 희망을 선사했다. 에우리디케는 정말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곧 나에게 우리가 그토록 의심하는 갈망들은 뒤에 숨어있을 뿐 우리 곁을 따라오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존재가 오르페우스처럼 연약해도, 그 적이 자본주의를 등에 업은 하데스처럼 막강해도 말이다.




우리는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많은 사람이 애쓰고 있는데도 달라지지 않는 부조리에 한숨을 내쉰 적도 많았다. 이 잘못된 세상은 분명 반복되고 있지만 그 형태가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다.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할 때 추위에 성냥을 구하던 에우리디케는 전과 달리 오르페우스가 남긴 한 송의 희망, 장미를 귀에 꽂고 있다. 세상은 묘하게 달라졌다. 눈치채기도 힘들 만큼 미세한 차이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도전하면 언젠가는 다른 결말을 맞을 것이라는 대책 없는 희망을 덜컥 믿게 된다.


모든 배역이 중요하지만 운명의 세 여신을 빼놓고 이 뮤지컬을 논할 수 없다. 모든 인물의 곁에서 해설하기도 하고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라고도 하는 여신들의 모습을 보면 이 극에서 운명이라는 키워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세 여신들의 노래에 따르면 에우리디케가 하데스타운으로 간 것도, 오르페우스가 결국 그녀를 구하지 못한 것도 다 정해진 운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의 끝에서 새로운 운명을 떠올린다. 그것은 바로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흔히들 ‘운명의 상대’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극을 보기 전까지 나는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환각에 눈이 멀어서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기어코 다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을 보며 생각을 고쳤다. 운명의 상대는 운명이 정해준 상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스스로 운명으로 정할 만큼 강렬하게 사랑하는 상대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에우리디케를 사랑하고 그녀를 구하러 떠나는 오르페우스처럼 우리도 끝없이 반복되는 환멸감 속에서도 더 나은 세상을 꿈꿔도 된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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