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경악의 목소리가 들린다. 해가 바뀐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2022년도 벌써 9월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남반구 지역을 제외하고) 겨울에서 시작되어 겨울에 끝나는 1년 중에서 중간지점의 여름은 상반기와 하반기를 나누는 기준점이 된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의 절기인 추분까지 지난 지금, 나는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지나간 여름을 추억하며 벌써 그리워하고 있다.
어떤 내용의 글이든 ‘여름이었다.’라고 끝맺으면 아련해지는 것처럼 여름은 지나가기만 하면 모든 기억이 미화되는 마력이 있다. 여름 당시에는 인상 찌푸리고 흐르는 땀을 닦은 기억밖에 없는데 벌써 여름이 그리운 나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여름의 마법에 쉽게 빠지는 나여도 미화될 수 없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에어컨이다.
에어컨, 무시무시한 폭염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고마운 존재.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사람들은 1902년 에어컨을 발명한 윌리엄 하빌랜드 캐리어의 노고에 감사해하며 그가 인류를 구원했다며 칭송한다.
확실히 에어컨이 없는 여름은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실내에서도 땀이 주르륵 흐르고 습기에 괴로워해야 하는 삶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할 따름이다. 에어컨이 지금처럼 상용화된 게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에어컨은 우리네 삶에 깊숙이 파고들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이렇게 더위와 습기가 맹렬한 공격을 펼쳐도 우리를 시원하고 뽀송하게 유지해주는 고마운 에어컨이지만, 나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에어컨 없는 여름을 고려해봤으면 좋겠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에어컨의 냉기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에어컨을 틀면 분명 시원하고 쾌적하다. 하지만 나는 이 냉기가 길게 이어지면 인위적인 추위에 불쾌함을 느낀다. 나는 남들보다 더위를 잘 안 타서 에어컨이 그렇게 간절하지도 않은데, 대부분 에어컨 온도를 최저 온도인 18도로 설정해서 시원을 넘어 추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준비성이 철저한 편은 아니지만, 여름철이 되면 강력한 에어컨 바람에 나를 보호해 줄 셔츠나 얇은 겉옷은 외출할 때마다 절대 빼먹지 않고 챙긴다. 언제 에어컨의 습격을 받게 될지 몰라 올해 여름에는 매일 셔츠나 가디건을 허리에 두르고 다녔다. 나도 한때는 여름에 반팔 티셔츠만 입고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최저 온도로 틀어진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팔다리에 소름이 돋은 채 오들오들 떨어야만 했다. 언젠가는 지나치게 시원한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가 너무 추워서 영화 내용에 집중도 못 한 적이 있다.
오랫동안 18도 온도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당연히 ‘추운 여름’을 감당하면서 살아온 나는 최근에야 한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나처럼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는 비주류 속성의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더운 여름철 밀폐된 공간에서 냉방이 지속될 때 나타나는 가벼운 감기, 몸살, 권태감 같은 증상’을 가리키는 ‘냉방병’이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는 것부터 이미 많은 이가 에어컨 바람에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함께 에어컨을 싫어하는 친구와 대화하다가 이런 말이 나왔다. 강한 에어컨 바람으로 두통이 올라와 조심스럽게 온도를 올렸는데, 곧바로 다른 누군가가 덥지 않냐며 다시 18도까지 온도를 내렸다는 것이다. 친구의 그 일화를 듣고 처음으로 회사, 카페, 영화관 등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모든 실내가 몇 시간 내내 18도의 온도로 에어컨을 가동하는 현실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모든 사람이 나와 친구의 기준에 맞출 필요는 없지만, 덥고 습한 여름에 에어컨이 꼭 필요한 마음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가장 낮은 온도로 바람을 맞아야 할까?
에어컨에 대한 불만을 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 굳이 글로 써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대부분 쾌적한 에어컨 바람에서 시원해했고, 나 역시 아무리 더위를 남들보다 안 탄다고 한들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적정 온도보다 조금 높지만, 얼마 안 가 전원을 끄긴 하지만, 어쨌든 나에게도 에어컨은 필요하다. 그러다 올해 여름, 심상치 않은 변화를 느끼면서 조금 심각해졌다. 과연 저 에어컨이 우리의 여름을 시원하게 해주는 존재인지, 더 뜨겁게 만드는 존재인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2022년은 전 세계가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기후변화의 현실을 마주한 해였다. 인도는 50도가 넘어 핸드폰이 먹통이 되는 사례가 발생했고, 기본적으로 20도 정도의 기온을 유지했던 유럽은 40도가 넘는 폭염을 기록했다. 미국은 가뭄과 폭염의 조합으로 대형 산불 화재가 수차례 발생했으며. 한국은 전례 없는 폭우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피해가 속출했다. 눈이 녹지 않는다는 뜻의 만년설은 지구온난화로 한 시간은 걸어야 눈을 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전 세계에서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하기로 유명한 나라다. 영하 20도부터 영상 40도까지 1년 사이에 60도를 넘나드는 폭을 자랑한다. 따뜻한 봄, 쌀쌀한 가을, 추운 겨울처럼 더운 여름은 한국인에게 지극히 당연했다. 올해 여름 역시 당연히 더웠고 시원하고 쾌적한 에어컨으로 그 더위에 맞섰다.
그러나 당연히 덥지 않아야 할 나라까지 이상한 더위를 기록하는 것을 보며 기후 위기가 눈앞에 닥친 문제임을 실감했다. 이제 기후 위기는 저 멀리 있는 북극곰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당장 우리 식탁에서 감자튀김이 사라지고, 예정된 개화 시기보다 일찍 피어나는 꽃들 때문에 꿀벌이 멸종하는 현실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이상 기후로 신음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를 감싸는 에어컨의 냉기가 더욱 불쾌하게 느껴졌다. 밖에서는 전보다 더워진 지구에 수많은 이가 고통받는데, 정작 나는 가디건을 주섬주섬 입으며 필요 이상의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싸워야 하는 현실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에어컨이 가동되면 열기를 배출하는 실외기도 열심히 돌아가고, 실외기에서 배출되는 프레온가스로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더욱 더워진 지구에서 버티기 위해 에어컨을 튼다. 이 아이러니한 악순환이 매년 여름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다.
최근 유튜버 김겨울이 기후 위기에 대해 언급한 인터뷰 영상을 인상 깊게 봤다. 그중 ‘기후 우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기후 위기와 같은 커다란 문제는 개인 한 명의 움직임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모두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나 빼고 모두가 무관심하다면 무기력이 뒤따라오는 건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무기력에서 비롯되는 기후 우울에 대해 김겨울은 무기력에 주저앉는 대신 매일의 선택을 자랑스러워하라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영상을 보며 공감되기보다는 부끄러워졌다. ‘나 하나 행동한다고 뭐가 바뀌겠어?’라는 생각에 무심히 저지른 선택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겨울은 신념과 삶이 일치할수록 안정감이 다가온다고 말했다. 신념은 꼭 거창한 행동을 통해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일상생활 중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아주 잠깐이라도 나 외에 다른 존재를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 나의 신념은 조금씩 완성된다.
이제 온종일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날씨가 서늘해졌다. 이제 냉방병과의 사투와도 끝이다. 그렇다고 나의 불편함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에어컨 바람이 사라진 자리엔 일회용품이 있다.
산업혁명 이후 우리 사회는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달려왔다. 갈수록 편해지고 빨라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편하지 않은 모든 것을 죄악으로 여기게 되었다. 에어컨 덕분에 우리는 덥고 습한 여름에도 시원하고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필요 이상의 냉기에 오들오들 떨며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도 있다.
편한 것이 꼭 필요한 것일까? 나에게 편한 게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을 품은 채 냉방병과 함께 여름을 떠나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