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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금미 Oct 08. 2022

삶보다 익숙한 죽음①

9월 23일부터 2022년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남은 100일 동안 성실하게 브런치에 글을 기고하겠노라 다짐했었다. 업로드 일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다짐은 장렬하게 실패했다. 


여러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러다 평생 안 쓸 것 같아서 간만에 여유로운 토요일 오후 좋아하는 카페에 앉아 가장 편하게 쓸 수 있는 주제의 글을 쓰기로 했다. 그 주제가 바로 '죽음'이다. 어쩌다 보니 제목이 상당히 거창해졌는데 그렇게 대단한 글을 쓸 계획은 없다(애초에 계획이 없다). 평소 자주 생각하던 것을 편하게 풀어쓰겠다는 계획만 세웠는데 내가 자주 생각하는 게 '죽음'이기 때문이다. 


최근 이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계기가 있었다. 감사하게도 한 인문학 모임에 초대되어 '실존'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라는 영화를 소재로 편하게 대화하는 자리였는데, 얘기가 지속되다 보니 생각보다 내용이 깊어져 내가 왜 실존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는지 설명하게 되었다. 혼자 집에서 성찰하다가 '실존에 대한 나의 고민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시작되었구나'라고 문득 깨달은 적이 있었는데 그걸 타인에게 말로 설명하니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내밀한 인생사를 푸는 일이 놀랍게도 부끄럽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사실 나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일은 어제 먹은 저녁 메뉴를 말하는 것만큼 아무렇지 않다.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존재하는 삶보다 그렇지 않은 삶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죽음이 나에게 갖는 의미를 설명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말로 설명하다 보니 20대 중반을 넘긴 내 인생에 10년도 채 머물지 않았던 그가 꽤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로 나는 오랜 브런치 공백(?)을 깨는 글로 아버지의 죽음으로 성립된 삶과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서술하고자 한다.


1. 떠난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7살 때 돌아가셨다. 너무 어릴 때 경험한 죽음에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사춘기 나이가 될 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집을 떠난 가장'의 이미지로 인식했다. 살면서  딱 한 번 아버지가 꿈에 나온 적이 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꿈 속의) 나는 창 밖으로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놀라 버선 발로 뛰쳐나가 아버지의 가슴팍을 내리치며 어떻게 7년 (당시 기준으로 돌아가신 지 7년이 지났었다.) 동안 떠나있을 수 있냐며, 왜 이제야 '돌아왔냐'라며 원망을 쏟아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말없이 나의 원망을 받아냈다. 꿈에서 깨고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구나. 맞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지'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슬펐던 적은 없었는데 그날은 좀 씁쓸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다시 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꾼 그 꿈이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나의 인식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아버지가 목숨을 다한 걸 알고 있지만, 본능적으로는 우리 곁을 떠나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 원인이 뇌진탕이었다는 사실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다(아무도 내게 설명하지 않았고 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병원에 가지 못했던 나는 며칠 기다리기만 하면 아버지가 건강해져서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아침, 언니가 방문을 열고 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 그때 머리를 스친 생각은 '병원에 갔다고 해서 모두가 병을 고치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구나'였다. 만약 내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면 많은 것이 달랐을 것이다. 뭐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사인도 모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에게 죽음의 이미지는 빈 자리였다. 부모가 두 명에서 한 명이 된 것, 가족 구성원이 줄어든 것, 이승에 가족을 남겨두는 것. 



2. 존재보다 익숙한 부재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글을 쓰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매거진 미러의 에디터로 활동할 당시 작성한 인스타그램에 올릴 짧은 에세이에서 처음으로 언급했었다. 


"나의 아버지는 내 인생에서 너무나 일찍 퇴장하셨다. 그가 남긴 건 파편 같은 몇 개의 기억뿐이었고, 나는 그를 통해 사랑보다 이별을 더 먼저 배웠다. 당시의 나는 죽음의 무게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기에, 아버지의 부재는 내게 어머니의 존재만큼이나 익숙했다." - 출처: 매거진미러 인스타그램(@mirrormgz)


나는 완성된 생각을 글로 쓰기보다는 글을 쓰면서 생각을 완성하는 편이다. 생각이 흐르는 대로 술술 쓰던 중 '나는 그를 통해 사랑보다 이별을 더 먼저 배웠다'라는 문장에 내가 썼으면서도 깜짝 놀랐다. 오랫동안 왜 아버지의 죽음이 슬프지 않을까 의문이었는데 그 문장 덕에 드디어 명쾌한 해답을 얻은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배운 기억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어린 시절의 기억은 흐릿하다. 아버지는 물리적으로 7년 동안 내 삶에 머물었지만 보통 기억은 3-4살부터 시작되니 내가 아버지를 기억할 만한 시간은 3-4년에 불과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함께한 아버지는 내게 영화로 치면 영상이 아니라 스틸컷처럼 남아 있다. 그 문장을 쓴 이후로 '죽음의 의미는 남은 자들이 부여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남은 자'가 되기엔 아버지와 쌓은 추억이 너무 없었다. 아버지는 내 삶에서 존재감을 남기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이 희미한 존재감은 가족들의 침묵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나의 동생은 나보다 더 일찍 아버지를 보냈다. 그나마 나는 파편적인 이미지라도 기억하지만 동생에게는 완전히 없는 사람일 것이다. 반대로 언니들에게는 아버지의 존재가 제법 생생하다. 그리고 아버지와 가정을 꾸린 어머니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니는 물론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거의 없었다. 내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죽은 자를 언급하는 것은 터부시되는 일이었다. 


나중에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주워들으며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모두 달라서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 기억 속에도 앞치마를 매고 요리하는 긍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혼재되어 더더욱 복잡했다. 함께한 시간이 있으면 정 때문에 미화되거나 증오 때문에 악화될 수도 있는데 그 시간이 없으니 상반된 아버지의 이미지도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내 몸속엔 아버지의 핏줄이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를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리로서 그렇게 된 것기 때문에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다는 의미로 '천륜'이라고 한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인데 그래봤자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 아닌가 싶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그래도 살면서 무수히 많은 이와 관계를 맺어왔다. 지금도 유지되는 관계는 물론 이미 끊긴 관계까지 포함해서 내가 인연을 맺은 사람 중 제일 의문스러운 존재가 아버지다. 인식 체계가 잡히기도 전에 떠나버린 사람을 어찌 파악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라는 사람 자체를 모르니 그의 죽음이 내게 슬픈 일인지도 (패륜적인 발언이지만) 기쁜 일인지도 정의내릴 수 없었다. 어떤 일에서든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적인 판단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아버지에 대해 '모르겠다'라고 당당히 인정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쓰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다음 글에 이어서 쓰도록 하겠다. 이번 글에서 아버지의 죽음 자체에 대해 자세히 다뤘으니 다음 글에서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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