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시산책자 Dec 15. 2022

Ep1. 공항에 갔는데 비행기가 없다

시리즈 <세상에 이런여행이>

보는 것 만으로도 눈부터 시작해 뇌(..)까지 시원해지는 지중해 바다, 그 옆에는 손수 만들었을 조개 장식들이 파도 소리 사이사이에 쨍그랑거린다. 나의 까만 정수리쯤은 금세 데워버리는 태양이 작열하고, 새하얀 벽들에 반사된 빛에 제대로 눈을 못떠 선글라스가 필수인 이곳... Welcome to 지상낙원 Greece!


그래요. 나라 이름만 들어도 파란 바다와 하얀 집들이 떠오르는 바로 그 그리스예요. 사실 한학기 독일 교환학생 신분으로 다른 서유럽 국가보다는 제법 먼 그리스까지 찍고 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데요. 그야말로 여행에 '미쳐있던' 당시의 저와 친구들은 6월 15일부터 약 일주일간의 그리스 여행을 야무지게 계획해 다녀왔습니다. 그 유명한 산토리니에서 시작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미코노스 섬을 거쳐, 마지막으로 수도 아테네를 잠깐 보고 다시 독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어요. 초여름에 그리스로 휴가 떠나는 삶.. 돌이켜보니 참 복받았었네요.

어느 여행지보다 기대하며 비행길에 올랐던 그리스는 만족을 뛰어넘을 만큼 저의 '최애 나라'로 우뚝 올라섰습니다. 줏대도 없이 지난 여행지들을 제치고 단 하루만에요.. 하지만 사진만 봐도 이해되지 않나요? 왜 다들 그렇게 산토리니, 산토리니 노래를 부르는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거라고는 새하얗고 새파란 것 뿐인데 그게 이리도 예쁠 수가! (관광지 답게 물가는 비쌌지만) 처음 맛보는 그리스 음식들도 최고였고요!

하지만 왜 다들 그리스 노을이랑 야경 맛집인거는 꽁꽁 숨겨뒀는지 모를 일이었어요. 산토리니의 이아(Oia) 마을을 해질 무렵에 내려다볼 때는 야경에 큰 감흥이 없는 제가 울컥할 정도로 아름다웠어요. 오른쪽 사진 속 미코노스 섬의 뜨겁게 타올랐다 져가는 해는, 다들 아무말도 못한채 감상에 젖어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는 말이죠. '정말 멋진 곳일거야-'라는 상상을 품고 계세요. 그러다 언젠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날이오면, 그때 선택하실 수 있게 내버려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실망할 일 없으니까, 그런 여행지가 인생에 필요할 때 그리스를 떠올려주셨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프롤로그를 읽고 오셨다면 제 여행 시리즈의 테마 잊지 않으셨죠?


일주일간의 여행이 이렇게 아름답게만 마무리됐다면 지금까지 엄지를 세우고 그리스를 입이 닳도록 칭찬하고 다녔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독일로 돌아오는 날 아침, 아무도 모르게 터졌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공항에서 독일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아침 8:15분 비행편이었어요. 시간에 맞게 공항에 도착하기 위해 부랴부랴 하룻밤 묵은 숙소를 일찍이 나섰습니다. 저와 친구들 모두 일주일간 지속된 여행에 꽤 지쳤던 탓에 눈만 겨우 뜨고 옷만 갈아입은 채 공항으로 향했죠.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시간 정도는 이동해야했는데, 여느 나라나 출근길은 북적거려 한번도 못 앉고 기대어 서서 꾸벅꾸벅 졸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때는 산토리니로 가는 여정 중에 캐리어가 한시간이나 나오지 않아 애먹었던 일같은 건 까먹어 갈 무렵이었지요. 별 생각 없이 공항에 내렸고 Terminal A와 B로 나뉜 갈림길에서 A로 갔습니다. 왕복 15만원 정도의 아주 매혹적인 가격으로 저희를 그리스까지 태워준 Scoot(스쿠트) 항공사 이용객은 그쪽으로 가라고 안내되어있었기 때문이죠. (아, 싼게 비지떡이라더니..)


그저 공항에 여유있게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한 저희는 자연스럽게 공항의 스크린을 찾아 올려다보며 스쿠트 항공 체크인 카운터가 몇번인지 스캔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아무리 위아래로 좌우로 읽어도 저희가 예약한 시간에 예정된 비행편만 비어있습니다. 빽빽해서 잘 보이지도 않았던 안내판에는 분명 8시, 8시 30분 비행편은 존재하는데.. 우리의 8:15분 비행기만 구멍 뚫린 듯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죠. 무엇보다 같이 간 4명의 친구들 눈에도 똑같이 보인다는 건 큰일이 닥쳤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공항에 갔는데 비행기가 없다는 사실.


그때부터 저희 다섯명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백지가 되었고 처음 겪는 상황에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더라고요. 그럼 독일에 어떻게 돌아가라는 거지? 애초에 무슨 상황이지? 공항을 왔는데? 이미 유럽을 여행하며 흔하디 흔한 1~2시간 지연은 화도 안 날만큼 쿨해졌지만, 스쿠트가 아무리 저비용 항공사에 연착과 취소로 악명 높다고는 하지만..! 출발 직전까지 예약을 도맡은 친구의 핸드폰도, 메일도, 설치한 앱 푸쉬로도 비행편 취소에 대한 알림 단 한번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저 멀리로 흩어져가는 정신을 붙잡고 안내 데스크로 달려가 (스쿠트는 싱가폴 항공사라 정식 데스크도 아니고 어딘가에 낑겨있던..) 상황을 설명했더니 "Yes, there is no flight today"라는 말만 불친절한 말투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예정되어있던 비행편이 연착도 아니고 그냥 사라졌는데 이 공항에서 당황하는 사람은 저희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러면 다음 비행편이 언제 있냐고 물었더니 이틀 뒤로 미뤄졌다고 하더라고요. 2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요. 아직 비몽사몽한 상태라 꿈을 꾸는줄 알았습니다..


넓디 넓은 공항에서 컴플레인 하는 사람이 저희밖에 없었던 거 보니 다른 탑승객들은 이 사실을 이미 알았던 거겠죠? 물론 미리 알았어도 아~주 어이없는 일이겠지만요. 하루도 아니고 이틀씩이나 미뤄지는 비행기표라니.. 연장할 숙소비라도 준답니까! 무엇보다 왜 저희만 아무런 공지 하나 못받았는지가 가장 의문이었어요.

바리바리 챙겨온 간식 먹으며 기다리는 새로운 비행기

네. 이제 사건은 터졌으니 수습 단계로 들어가야겠죠. 저희 다섯명은 그대로 공항 한 구석탱이에 주저 앉아 각자 스마트폰을 들고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왜 굳이 바닥에 앉았나 싶은데요. 기억을 되돌려보니 정말 앉을 의자 하나 없었습니다. 절대 궁상 맞은 상황의 연출이 아니었다는 점 참고부탁드려요. 아무튼 곧바로 두 명은 스쿠트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고(무응답으로 그친), 한 명은 블로그를 검색하며 비슷한 사례를 찾아 헤맸고, 두 명은 당장 스카이스캐너(비행기표 비교 어플)를 뒤져가며 최선과 차선의 비행기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열띤 토론 현장 마냥 다섯명의 머리에서 갖가지 해결책이 나왔어요.


1) 아테네 시내로 돌아가 숙박을 이틀 연장하고 더 관광한다.

> 추가로 드는 숙박과 관광 비용 + 당장 다음날 수업에서 발표가 있어 fail

> 이미 진이 쭉 빠져 여행할 기분이 안들어서 fail (지금 생각해보니 이렇게 할걸 그랬어요)

2) 가장 빠른 다음 비행기표를 끊고 돌아간다.


저희가 택한 방법은 2번이었는데 이 과정도 물론 험난했습니다. 이 비행기가 한국 집으로 돌아가는게 아니라는 사실은 위안이었습니다. 그나마 유럽에서 유럽으로 돌아가는 2~3시간짜리 비행편이라 선택지는 있었는데 문제는 가격이었습니다. 당장 몇시간 뒤에 탑승할 비행기표를 찾는데 저렴할리가 있나요! 1,250원 내는 버스나 지하철도 아니고.. 최대한 합리적인 비행편을 찾으려고 노력했는데요. 아직도 기억나는게 비행기 타고 파리로 입국해 다시 버스를 7시간 타고 독일로 가는 방법도 있었고요. 아니면 저희가 이미 지나온 산토리니를 경유했다가 돌아가는 항공편 등이 있었는데..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이 그리스 여행은 최대한 빨리 끝맺어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걸 알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덤..!)


결국 저희 중 아무도 부유한 사람은 없었지만 다같이 그 자리에서 독일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200유로, 약 27만원쯤 주고 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본 만수르 체험이네요. 원래 끊었던 왕복 항공권보다 두배 비싼 편도 항공권이라니.


사람이 간사한게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이 모든걸 잊고 그리웠던 기숙사 침대에 풀썩 뛰어들어 잠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감사해지더라고요. (가격은 저렴하되 집까지 10시간 이상 걸리는 기나긴 여정보다는요..) 어쨌든 손에 강제로 쥐어진, 아침까지 상상도 못했던 항공권의 비행시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던지라. 저와 친구들은 한시간 안에 벌어진 이 어마무시한 사태를 곱씹으며 허탈 웃음을 짓다가 독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음- 사실 돈으로 수습한 것 치고는 성인이 된 대학생~직장인에게 30만원이 눈 뒤집어질만큼(!) 큰 금액은 아니니까, 지금 생각하면 속이 쓰린 정도에 그칩니다. (그래도 발에 불나도록 공항을 뛰며 상황을 파악했던 당황스러운 마음은 전해졌길..) 하지만 당시에는 비행기에서 잠이 안오더라고요. 경비 아껴보겠다고 한마음으로 찾아내 기뻐했던 특가 항공권, 럭셔리 보다 가성비를 탁해 저렴하게 타협했던 숙소 비용, 사고 싶었지만 가격을 보고 살포시 내려놓았던 기념품들이 아른~아른~거려서 말이죠. 참고로 증발해버린 비행편에 대한 스쿠트의 환불은요. 이 사건 또한 '기억 미화' 과정을 거치고 있을 무렵이었던 9월 중순의 어느 날, 갑작스럽게 7만원 가량 받았습니다! 아 물론 저는 이미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을 돌아온 후였어요.


웜톤의 빛이 참 예뻤던, 고즈넉한 분위기에 파르테논 신전을 품은 아테네..로만 기억됐으면 참 좋겠지만 이 사건을 온몸으로 겪어낸 저희 다섯명에게 아테네하면 아찔했던 '비행기 증발 사건'이 먼저 떠오릅니다. 뭐 직접적으로 아테네와 스쿠트 항공사와의 관계는 없지만 어쨌든, 전날 아테네 시내에서 먹은 그릭 요거트 보다는 강한 인상을 남긴 사건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저희는 아직 한마음 한뜻으로 아테네를, 그리스를, 함께 보낸 여름 시절을 더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하호호 웃을 수 있는 선에서 사건이 해결됐음에, 날려버린 30만원을 열심히 갚아냈음에, 그래도 '멘붕'인 상황에 친구들이라도 옆에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말이죠. 아.. 근데 저희는 이 사건 이후로 트라우마에 단단히 걸려 비행편이 혹여나 취소되지 않았을까 집착 수준으로 확인하는 병을 얻은건 비밀로 해요.


여러 폭풍같은 사건을 겪어내며 온갖 상황에 대비해보지만 그것마저 깨버리는 것이 바로 여행! 앞으로 전할 더 많은 에피소드들이 궁금하시다면, <세상의 이런여행이>를 주목해주세요!

작가의 이전글 Prologue. 세상에 순탄한 여행은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