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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산책자 Apr 24. 2023

타들어가는 정수리의 뜨거움을 즐겼고

시리즈 <도시산책자의 영감>

시리즈 <도시산책자의 영감>은 제가 여행 속에서 보고 들으며 떠올린

생각과 영감 중 나누고 싶은 조각들을 골라 기록하는 간이 코너입니다.


서류탈락, 서류합격, 면접탈락, 면접합격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러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잊을만하면 브런치에서 글을 쓰라는 알람이 지속적으로 오더라고요. 하지만 그런 푸쉬는 신경쓸 여유도 없을 만큼 취준생의 삶은 고달프더라고요! 어쨌든 쳇바퀴처럼 돌던 우울한 구직 과정 끝에 인턴 자리를 얻게 되었어요. 그럭저럭, 여전히 여행 생각을 하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아무도 안물어봤는데 말이 많네요ㅎㅎ)


글에서도 여러번 언급했지만.. 저는 교환학생 때 원없이 여행을 다녔어요. 이 글들도 그때의 기록이고요. 그리고 tmi지만 저는 극 ENFP라서 상상력이 아주 풍부합니다. 기억력도 좋아서 한국에 돌아온지 벌써 몇개월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여행을 다니던 그때의 순간들이 너무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그래서 일상을 살면서도 여행의 '짧막한 순간들'은 마치 TV 채널을 돌리듯이 휙휙 지나가고는 합니다.


지하철 역에서 파는 와플을 보면 브뤼셀에서 친구들과 '찐 벨기에 와플'을 먹으러 왔다며 깔깔거린 거리, 대화, 순간이 떠오릅니다. 웬만한 한국 카페에서 필수적으로 있는 감성 인테리어 소품들 속 필기체로 쓰인 London이나 Paris를 마주칠 때마다 속으로는 제가 거닐었던 두 낭만적인 도시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여행을 다녀온 누구나 겪는 증상 아니냐고요? 고백하건대 저는 조금 중증입니다. 아~ 이정도로 돌아오지 않을 그 순간들이 사무치도록 그립습니다.


아무튼 오늘 퇴근하고 집 근처 공원으로 러닝을 하러 가던 길이었어요. 지겨울 만큼 똑같은 그 길을 걷는데, 정말 문득 스톡홀롬에서의 기억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원래 겪어오던 증상(?)이니까 넘어가려고 했는데 떠오른 기억과 감정을 브런치에 남겨야겠다는 생각까지 이어졌습니다. 오늘 하루종일 '브런치'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안했는데 장장 4개월만에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지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그러면서 현실에 치여 살다가 까맣게 잊고 있던 어떤 단어가 떠올랐어요. 도시산책자.

그렇습니다. 제 필명이기도 한 도시산책자는 제가 추구하는 여행방식이자, 제가 따르고 있는 여행 방식이자, 영원히 제 것으로 남겨두고 싶은 그런 단어입니다. 어떤 의미인지 감은 오시죠? 관광이 아니라 산책하듯, 도시를 느긋하게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여행자요. 그리고 스톡홀롬에서의 하루가 도시산책자 그 자체여서 저는 이날을 여행하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추억하고 있습니다. 혼자 떠났던 여행이라 같이 얘기할 사람은 없지만, 깊이 좋아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행을 얼마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깨닫기 위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때만큼의 여유를 무의식적으로 갈망해서일까? 다시 여행이 시작되려는 징조일까? 답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저는 2022년 5월 6일의 스톡홀롬의 기억을 글로 남겨두려고 왔습니다.


스톡홀롬에서 눈 뜨는 두번째 아침이었습니다. 서둘러 준비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날씨가 정말 좋더라고요. (사진만 봐도 느껴지시나요? 한국 미세먼지들 눈 감아..) 스스로 날씨요정인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라고?! 다시금 자부심을 느끼며 숙소에서 정처없이 시내(감라스탄)까지 걸었습니다. P인 저에게는 거창한 계획도, 크게 갈 곳도, 가고싶은 곳은 없으니까요.


연두색 이파리, 아직 떨어지지 않은 벚꽃, 파란 하늘. 그냥 도시를 걷는 것만으로도 신날만 하지 않나요!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보니 선착장이 나왔습니다. 보자마자 생각했어요. '와.. 예술이다'

고풍스러운 뒷 건물과 하얀 구름 그리고 떠있는 배들까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수 있나 싶었어요. 사진에는 잘 안나타나겠지만,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주변 사람들의 적절한 소음을 넣어 상상해본다면 우연히 이곳을 마주친 저의 벅찬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실 거예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각했어요. 오늘 하루는 여기서 써야겠다고!

선착장 주변을 빙빙 돌다보니 벤치가 있더라고요. 날씨가 좋아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는데 그중 비어있는 곳에 자리를 턱 잡았습니다. 아 맞다. 그전에 사람들이 모두 '아이스크림 바'를 하나씩 물고 있길래 저도 하나 사와서 물었답니다. (살인적인 북유럽 물가에서 사먹을 수 있던 유일한 간식이기도 했는데 정말 맛있더라고요!)


그렇게 저는 그 벤치에 앉아서 장장 두시간을 있었어요. 두시간.. 회사에서는 20분도 안가는데 무려 두시간을 앉아서 코앞의 윤슬과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1시쯤 되니까 해는 쨍쨍해서 따뜻함을 넘어 뜨겁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 뜨거움이 너무 좋았어요. 그늘 하나 없는 벤치에서 약간 찡그린 채로 받아들였던 그 햇살이 정말 행복했어요! 그래서 얼굴이 벌겋게 익든 살이 타든 그 한자리에서 오롯이 타들어가는 정수리의 뜨거움을 즐겼습니다.


사실 이날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납니다.. 저는 늘 심오하고 싶으나 꽤 단순한 사람이라서요. 해봤자 '행복하다' 정도였을 것 같긴 하네요. 그런데 감정과 이때했던 결심만은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아, 앞으로 여행을 한다면 이런 식으로 하자. 끌리는 장소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며 멍때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그런 여행. 어차피 내 기억 속에 기억될 여행은 내가 만드는 거니까.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2020년 초에 혼자 유럽여행을 왔을 때 안그래도 빡빡한 일정을 내내 긴장하면서 돌아다니느냐고 막상 돌아오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적었거든요.


(본문이 길어져서) 이걸 쓸까 말까 고민을 좀 했는데, 사실 스톡홀롬에서의 두시간을 더욱 특별하게 해준건 사진 속 아저씨와 small talk였어요. 제 옆 벤치에서 저보다 먼저 앉아 강렬한 햇빛을 즐기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꽤 길게 얘기를 해서 스시를 정말 좋아하신다는 것까지 기억에 남아요. 인상도 너무 귀여우시지 않나요ㅎㅎ


그렇다고 시덥지 않은 얘기만 한건 아니에요. 교환학생을 하면서 '해외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던 때고, 마침 진로를 물어보길래 이런 생각을 전했더니 "맞아. 해외에도 많은 기회가 있고, 아직 젊으니까 분명 할 수 있을거야"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아직 방황하고 있지만 이 꿈은 잃지 않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낯선 땅에서 받은 이 응원이 시간이 흘러 흐릿해져가고 있었는데 이 브런치 글을 쓰면서 생각이 났어요. 오늘 갑작스럽게 스톡홀롬이 떠오른 이유가 이것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여담으로 유럽으로 다시 나온다면 스웨덴은 어떻냐고 하셨어요. 근데 조금 전에 스웨덴은 여름과 겨울의 삶이 극적으로 다르다, 여름에는 해가 길어서 다들 이렇게 밖에 나와 summer을 즐기지만 겨울에는 home-office만 반복해서 조금 우울하다고 하셨지 뭐예요. 눈치채셨겠지만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고, 낮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북유럽은 고민 좀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떠오르네요.


좋은 대화와 오래 간직할 추억을 만들어주신 옆자리 아저씨! 덕분에 스톡홀롬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다섯 손가락 안에 듭니다.


제가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반짝거리는 윤슬 사진으로 마무리를 해 봅니다. 다시 읽어보니 여러 주제가 섞인 난잡한 글이 되어버린 느낌이지만, 이날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은 다 쏟아낸 것 같습니다. 한글자 써내려가기 부담스러워 미뤄왔던 브런치도 재연재도 어찌저찌 하게 되었고요.


스톡홀롬에 또 여름이 다가오고 있겠네요. 가능하다면 한번만 이 순간으로 돌아가 두시간만 다시 햇빛을 쬐버리고 싶지만 아무리 더 화창한 날이 와도 올 여름 선착장에 저는 갈 수 없겠죠? 하지만 그때의 풍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순간이었기에, 당장은 사진과 글로 5월의 스톡홀롬을 추억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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