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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 Dec 20. 2021

위로를 너무나 잘하는 사람들

내 인생에서 본방사수로 끝까지 본 드라마는 여지껏 딱 한편이 끝이다. 한창 국시생으로 구르고 있을 때 스트레스 관리 겸 찾아보던 '도깨비' 국시 치는 전날에도 본방 사수하고 컨디션 관리를 위해 곧장 잠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내게 명대사로 남은 드라마는 따로 있는데 바로 '별에서 온 그대' 아주 유명한 명대사.


[내가 바닥을 치면서 기분 더러울 때가 많았는데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어. 사람이 딱 걸러져. 진짜 내 편과, 내 편을 가장한 적. 인생에서 가끔 큰 시련이 오는 거, 진짜와 가짜를 걸러내라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닌가 싶어.]


부산에서 살다가 서울에 온 순간 내 인생은 한번 망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사랑하는 사람만 바라보고 따라온 건 정말 바보 천지나 할 짓인데 내가 그걸 했다. 인생이 망하고 나니 내 주위에는 정말 내편으로 가득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설마 설마 드라마로 보고 듣던 대사를 내가 입 밖으로 내뱉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다고 내가 천송이라는 건 아니고. 가짜로 판치는 세상 속에서 살던 게 아니라 진짜를 몰라보던 세상 속에서 살고 있었다.


마스크가 없는 세상이 낯설어진 코로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지금 내 인생은 한번 더 망한 것 같다. 돌아다녀서 걸렸을 테니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를 코로나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나 때문에 코로나에 걸렸다며 연인이었던 사람은 나를 원망했다. 코로나 완치 후 퇴원을 하고 나니 완치자 대상으로 우울감 설문 문자를 받았다. 퇴원을 하고서 떨리는 마음으로 사회복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는 이런 지원도 해주는구나 하고 말았는데 이리저리 치이고 나니 그 문자를 왜 보내주는지 알게 되었다. 아 이래서 보내주던 거였구나.


혼자 맞이할 생일이 무서워 부산으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다. 한 일 년 만인 것 같았다. 워낙 무뚝뚝한 집안이라 내 생일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야 생일인 줄 알았으면 미역국을 끓이는 건데. 하셨지만 오랜만에 엄마 손맛 김치찌개에 누룽지를, 나를 위해 차려준 밥상이라 충분했다고 답했다. 엄마 나 속상해. 하고   응석을 부리니 그러게 혼자 있으니 더 그렇지? 하고 땡이었다. 아마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위로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 엄마 집 리모델링이 끝나면 부산에도 네 방하나 말 들어줄게. 하고 나를 울릴뻔했다.


어쩌다 한 번씩 만나는 대학 동기들을 만났다. 사실 그렇게 친하다고는 말하기가 좀 뭐한데. 단톡이 아니면 갠톡 할 일이 잘 없는 사이다. (이걸 알면 속상해하려나. 나 MBTI I라서 낯을 좀 가려. E인척 했던 거야.) 모임 총무의 주도하에 빵빵해진 계비를 털 겸 연말인 겸 힘들게 시간을 내서 만났더니 내 하소연 파티였다. 장장 9시간을 떠들었다. 술 먹고 울기도 하고 취해서 잠들고 토하러 가고 바다 보러 가겠다며 산길을 뛰어다녔다.


사실 슬퍼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 있는 건 무섭고 이것도 저것도 다 싫은 짜증 가득한 상태로 만나서 혹시나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생일파티 겸 하소연 파티를 하는 중에 몬난이 인형처럼 울고 있는데 눈물이 쏙 들어갈만한 드립을 치는 게 아닌가. 나와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친구들은 함께 공감해줬다. 그리고 울어줄 수 없는 친구들은 나를 웃겨줬다. 아니 세상에. 웃음이 입 밖으로 비집고 나오는데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분명 슬퍼하고 있었는데 웃고 있다게, 웃을 수 있다는 것에 안도를 느꼈다. 웃으니까 눈물이 그쳤다. 눈물이 그치니 그제야 내 앞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모두 다 써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노을이 예쁘다는 게 느껴졌다. 예쁜 걸 보고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렇게 빨리 슬픔을 떨쳐버릴 수가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노랗게 들이치는 노을이 금세 사라지고 흰 눈이 뒤덮인 풍경이 나왔다. 어쩜 이렇게 한순간이 변할 수 있는지. 좋았다 슬펐다 화났다 예뻤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구나하고 생각하는 사이 해가 쨍쨍이던 부산에서 흰 눈이 소복이 쌓인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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