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비평

정상성? 환상통입니다

박찬욱, <올드보이>

by 조연지


올드보이를 오이디푸스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오대수의 삶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오이디푸스와 같은 궤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스 신화에 머무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현대의 관점에서 올드보이가 사회의 어떤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지 비추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비평 또한 ‘나’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주축으로 삼는다.


2003년 <복수는 나의 것>이 등장한 다음 해에 <올드보이>가 나타났고 뒤이어 2005년, <친절한 금자씨>가 등장한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이라 불리는 세 편의 영화는 논리적으로 혹은 간편하게 범죄를 설명하지 않는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정의를 느낄 만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그들 역시 윤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정의로부터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완범(신하균)은 유괴를, 대수(최민식)는 딸과 근친상간을, 금자(이영애)는 살인 공조를 도모한다. 박찬욱은 윤리와 정의를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수행하는 이들은 ‘정상’사회와 거리가 멀다. 이들은 ‘정상’사회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보호받지 못한다. 억울함을 호소할 권리가 없다면, 혹은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어떻게 보호하겠는가?

이미 우리 사회엔 억울한 이들이 넘쳐난다. 억울함을 공감하기 이전에 정당성을 판가름하는 것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권리를 좌지우지하는 윤리는 ‘정상’사회가 정한다. 사회의 ‘정상성’을 정하는 이들은 지배자(권력자)들이다. 억울한 피해자, 억울한 가해자를 양산하는 그들의 윤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이 비평의 시작이다.



기절한 사람한테 약을 먹일 수가 있어야지


고시원을 떠올리게 하는 좁은 방에는 침대와 벽에 걸린 액자, 캐비닛형 화장실이 있고 세상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TV가 있다. 도대체 누가 자신을 가두었는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언제 나갈 수 있는지 묻던 오대수는 어느 순간 외침을 그만둔다. 자신의 아내가 죽었고 그 살인범은 바로 자신이라는 뉴스가 방송된다. 대수를 감시하고 잠재우고 밥을 주고 통제하는 누군가가 살해를 조작한 것이다. 그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을뿐더러 쫓기는 범죄자 신세가 된다. 개인은 너무나 쉽게 무력해진다. 사회적 지위와 질서가 권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대수는 무력한가? 살아야 하고, 살아 나가서 복수를 해야 한다. 그는 더 이상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는 도망자다. 돌연히 고립되었고 소통에 실패당한 자이며 완전히 혼자가 된 사람이다. 그는 이제 스스로를 단련한다. 그 누구도 믿지 않기로 한다. 좁은 방에서 근육을 키우고 주먹으로 벽을 치며 몸싸움을 연마하고 벽을 파내 탈출을 시도한다.


오대수의 탈출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벽을 뚫고 비의 감촉을 느꼈지만 캐리어에 담겨 자신이 납치된 장소에 옮겨진다. 15년이란 시간이 흘러 그곳엔 아파트가 들어섰다. 대수는 아파트 옥상에서, 강아지를 안고 자살하려는 남자를 불러 앉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요,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라고 말하는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려는 차에 대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고, 남자는 옥상에서 추락해 1층에 닿는다. 남자는 이 땅을 포기했다. 그리고 오대수는 혼자된 이를 외면했다. 도망자는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를 고립시키기도 한다. 도망자들은 어째서 도망자가 되는가 질문해야 한다. 그들의 외로움, 우울, 분노는 무엇이 낳는가?

오대수가 개미 환각을 보았다는 일기를 보고 미도는 말한다. “고독, 하면 무조건 개미죠. 내가 만나 본 진짜 외로운 사람들은 다 잠깐이라도 개미 환각 겪었어. 개미들은 항상 떼로 다니잖아요.” 미도 자신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다 말하지만 미도가 지하철에 혼자 앉아 있는 장면이 나타난다. 눈물에 화장이 번진 얼굴이다. 반대편에는 거대한 개미가 앉아있다. 그리고 이내 미도가 앉아 있던 자리에 개미가 대신 앉아 있다. 떼 지어 오대수의 몸을 타고 오르던 개미와 미도가 본 외톨이 개미. 대수와 미도는 무리에 속하지 못하며 타자화된 인물들이다. 미도의 자기부정은 정상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도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전 별종인가 봐요. 손이 굉장히 차거든요.”


미도가 밀어 넣은 좌약처럼 대수의 운명은 꼼짝없이 우진의 손 안에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죄를 뉘우치려 한다. 미도를 통해 느낀 사랑과 기쁨은 혀를 자르는 고통보다 커다란 것이다. 그의 새 삶은 미도가 선물한 것이나 다름없다. 15년 전, 딸의 생일선물로 주려고 한 천사 날개는 15년이 지나 미도의 날개가 된다.

오대수는 미도와의 삶을 지속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미도는 그의 친딸이다. 대수는 모르기를 택한다. 자신이 통제당한 방식인 최면을 통해 미도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지운다. 그가 치료약으로 자신을 고통에 밀어 넣은 방법과 동일한 ‘최면술’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미도를 끌어안으며 지은 대수의 표정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가 이룩한 해방은 완벽할 수 없다. 외부 요인을 바꾸는 것 대신 스스로를 바꾸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우진에 의해 조작된 기억 어디쯤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기억이 뒤엉켜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최면술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삶을 타협한다.



살아있는 게 먹고 싶다고 했다


앞서 언급한 개미 이미지는 반복해 등장한다. 몬스터, 괴물로 불리는 오대수가 좁은 복도에서 다수와 겨루는 장면은 개미굴을 연상시킨다. 이 외톨이 개미는 개미떼와 마주하며 감금시설 최고 관리자인 박철웅을 향해 나아간다. 그를 막는 이들은 박철웅의 하수다. 이들을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돈이다. 그들의 우두머리 박철웅은 돈이 자유라고 착각하며 돈에 자유와 감정을 팔아버린 자다. 그는 돈을 받고 복수심을 누그러뜨릴 만큼 돈에 의해 부자유하다.

오대수는 그의 반대에 선다. 철저히 감정으로 움직이는 인물이다. 표정이나 행동은 정적이고 기이해 보이지만 다른 이들은 어떤가? 오대수는 살아있는 것들 모두에 분노를 품었다. 미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 대수를 강제로 자신과 동일한 상황에 위치시킨 우진과 비교해 보자.


우진의 근친상간 대상은 누나 수아였다. 수아는 댐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에 우진의 목에 걸린 카메라로 자신을 찍기도 하고 우진이 자신에게 애무를 하는 동안 거울을 꺼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수아의 자기애적인 사랑과, 우진의 수아를 향한 사랑은 그들이 다니는 가톨릭학교에서의 윤리와 정반대에 위치한 욕망이다. 우진의 꼬리뼈 부근에 새겨진 십자가 문신이 비대칭을 강조한다. 교회에서 문신은 죄악으로 여기지만 그 형태는 십자가를 하고 있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살펴보면 이우진은 외로움이 많았다. 군중에서 쫓겨났고 가장 가까웠던 수아의 죽음이 그를 더 홀로 만들었다. 모순되게도 어쩌면 살릴 수 있었을 수아의 손을 놓은 것은 우진이다. 그는 둘이서 소문을 해쳐나가는 것을 택하지 않고 소문의 근원을 없애는 쪽을 택한다. 그는 잠잠해지길 바랐고 그것은 교회 윤리와 자기 정체성의 충돌로부터 오는 자기부정이다. 이 죄책감으로 인해 미도에게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는 오대수의 부탁을 들어줬는지도 모른다.

우진은 수아의 죽음으로 한 번, 대수는 15년 동안의 감금으로 한 번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죽음 이후 정적이고 기계적으로 돌변한 두 사람은 살아있는 것들에 혐오를 품는다.


우진이 지내는 펜트하우스는 온기를 느낄 수 없는 공간이다. 두 괴물이 이곳에서 정면으로 대치한다. 대수의 전신이 우진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나란히 놓이는데, 이때 대수는 작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오대수는 이우진이 만든 또 하나의 이우진이니, 결국 우진 또한 무리에서 소외된, 외로움과 복수심으로 점철된 왜소한 자가 된다.

우진은 대수와 겨루는 과정에서 자신을 오래 보필한 한 실장을 총으로 쏜다. 자신이 갈아입은 깔끔한 양복에 피가 튀었는지 확인하는 장면은 우진의 결벽증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게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찾아볼 수 없다.


오대수는 사랑을 되찾아 외톨이에서 벗어났다. 그의 복수심은 조작된 것이었다. 진실을 깨닫자 그에게 남은 것은 사랑이다. 미도를 향한 사랑뿐. 미도와의 만남은 조작된 것이었지만 미도와의 관계는 조작된 것이 아니다. 이는 우진의 말에 실려 온다. “실장님, 미도는 진짜로 오대수를 사랑하게 된 걸까요? 벌써?” 분노를 통제하는 것보다 사랑을 통제하는 일이 더 어려운 것 아닐까? 때문에 분노를 조장하거나 분노의 화살을 개인에게 돌려 사회를 통제하기도 한다. 우진은 분노의 표적을 잘못 택했다.



잠언 6:4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옥상에서 뛰어내린 남자는 답을 알고 있었다. ‘짐승만도 못한 놈’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삶에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대체 누구일까? 남자는 살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나온 삶은 짐승 같았을지 몰라도 앞으로의 삶에는 정당성을 부여 받길 간곡하게 바라고 있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대수의 외면에 곧바로 삶을 거두었다. 개인의 생각은 사회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반복된 억압, 고립의 형태일지도 모르는(그의 과거는 영화에서 설명되지 않기에) 압력으로 생각이 희미해진 자다. 그는 스스로 구원에 실패한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의 세계에서 웃음을 잃은 자다. 차를 향해 돌진하는 어떤 비둘기처럼 그는 기형적으로 존재하기를 포기한다.

때문에 오대수가 이우진의 손에서 벗어난 노루라고 말할 수 없다. 둘은 같은 그물 아래 있는 새다. 고통을 품은 자는 끼어들 틈이 없는 세계 안에서 쫓기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논리를 바꾸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진과 수아, 대수가 다닌 상록고등학교는 가톨릭학교다. 종교와 가문의 권력, 영토를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해온 역사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있다. 프랑스 교회는 세속 가문들이 세력을 키워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근친혼을 금지한다. 지속적인 근친혼이 유전적 결함을 낳아 일상생활에 지장을 겪거나 일찍 죽은 이들도 있다. 현대에는 유전학적, 윤리적 문제로 근친혼을 금기시한다.

과거에는 권력을 위해 당연시 되던 것이 금기시 되었다. 윤리의 기준은 바뀐다. 유전병이 함께 세속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을 서슴치 않던 당대 사람들을 현대의 윤리로 판단하면 극악무도하다. 근친혼이나 근친상간을 옹호하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싶다. 윤리가 '정상성'을 결정한다. 시대의 상식은 당대 지배계급의 이념이다.


미도와의 삶을 택한 오대수의 해방은 아나키즘적이다. 무정부주의적인 두 사람만의 세계. 소문의, 다수의, 정상성의 피해자 이우진이 탄생시킨 피해자 오대수는 미도와 함께 외롭지 않은 삶을 살 수는 있겠으나 온전한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를 추방시킨 낙인과 고립의 부조리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미도와의 관계를 조율할 수 없다.

부조리는 이우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진과 수아에게 낙인 이후의 새 삶이 마련되었다면 그들은 삶을 포기하거나 고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상성’에서 한 번이라도 이탈한 자가 다시 ‘정상’사회로 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다. 이탈의 이유를 들여다보는 것은 ‘정상’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것보다 시간이 들고, 궁금하지 않고, 귀찮기 때문이다.


미도가 진실을 알게 되거나 유전적 결함이 있는 아이를 낳거나 한 명이 죽음에 이르거나…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일시적 해방 상태는 진정한 해방도 사랑도 아니다. <올드보이>는 오대수가 찾아낸 만두집 이름 ‘자청룡’, 붉은 동시에 푸른 용처럼 모순된 개인이 맞이하는 우중충한 보랏빛 미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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