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말하는 산삼'이라는 동화책으로 시작한다. 연두색 표지에 눈을 감은채 있는 커다란 산삼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문제의 동화책은 30년이 훨씬 더 지난 내 기억 속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병든 부모님을 위해서 송장의 다리를 떼다가 약으로 쓰면 낫는다는 말을 들은 주인공이 밤중에 몰래 남의 산소를 파 해쳐 다리를 떼어 도망치고, 산소의 주인은 밤중에 무덤에서 벌떡 일어 나서 '내 다리 내놔!' 소리치며 쫓아오는 다소 공포스러운 내용이다. 결론은 그 떼어온 다리가 알고 보니 산삼이더라 하는 내용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기가 읽기에는 무서운 내용이 아닌가 싶다. 내용은 그렇다 치고, 동화 구연의 정도에 따라서 그 공포 분위기는 아이에게 배로 전해 진다. 어머니께서도 이 동화책을 실감 나게 읽어주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아마 소스라 치게 싫어했으니 읽어주시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다만, 나는 동화책 좋아했으며 어릴 때부터 카세트테이프를 라디오에 넣고 혼자 틀어서 들을 줄 알았기 때문에, 동화책의 그림을 참고자료 삼아 부록으로 딸려온 동화구연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전래동화 전집 중에 유일하게 무서운 이야기인 것을 알리 없는 나는 동화책에 부여된 넘버링을 따라가며 그날도 카세트를 틀었을 것이다. 실감 나는 풀벌레 소리, 소쩍새 소리 하며 비 오는 소리 시체가 걸어오는 쿵쿵 소리부터 '내 다리 내놔!' 소리치는 것까지 카세트테이프는 전래동화의 내용을 생생하게 전해 주었다. 아마 처음 듣던 날부터 경기하듯 소스라치며 엄마를 찾아 소리쳤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훨씬 커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그 연두색 표지의 동화책을 만지는 것조차 무서워했을 정도니 말이다. 책 내용은 물론이고 그 책 자체를 무서워한 것이다.
그 후로는 동화책에서 비롯된 귀신, 유령 따위에 대한 공포가 당시 유행했던 전설의 고향, 토요 미스터리 등의 TV 괴담 프로그램에 대한 두려움으로 진화(?)하였고, 토요일 밤이나 전설의 고향이 방영하는 날이면 티브이 소리를 듣기 싫어서 다른 방으로 도망 다니기까지 했다. 뭐 귀신에 대한 공포는 여느 아이나 다 가지고 있으니 특별할 것도 없는 기억이긴 하다.
동생과는 4살 터울이기에 동생이 정말 어린 아기 때부터 내 기억은 비교적 생생하다. 동생의 경우 의외로 귀신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반면 이상한 걸 무서워했다. 지금의 이월드인 우방타워랜드가 도보로 10분 거리였던 옛 집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주말마다 성대한 불꽃놀이를 했는데, 동생은 큰 소리며 번쩍이는 불꽃을 상당히 무서워했었다. 이외에도 식물과 동물을 다양하게 무서워했다. 어느 날 보았던 애니메이션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꽃 같은 것이 묘사된 적이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보고 나서는 한동안 꽃도 무서워했었다. 할아버지께서 꽃을 좋아하셔서 집안 곳곳에 난이며 화초를 키우셨는데 꽃만 보면 소리치고 도망 다니던 동생이 기억난다. 좀 커서는 강아지를 엄청 무서워했었는데, 동네에 사나운 강아지가 많았던 까닭일 것이다. 그 덕에 동생은 다 큰 지금도 멀리서 조그마한 강아지라도 오면 일부러 멀찌감치 피해서 걷는다.
이처럼 아이들은 어른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다양한 이유로 무서워할 수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기억 깊은 곳부터 되짚어본다. 왜냐면, 갖 돌이 지난 우리 아들은 참 신기한 걸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돌잔치를 하기 전 아버지께서 선물로 전동 자동차를 사주다고 전화를 하셨다. 당장 아이가 타지도 못하고 집에 이미 장난감으로 미어터질 지경이라 아직까지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이미 다 살 것처럼 가게 사장님께 말한 것이 민망하고 죄송스러우셨는지 전동차 대신 작은 꼬마버스 타요 RC카를 사서 돌잔치하는 날 전해주셨다. 리모컨으로 조정하면 천천히 움직이는 귀여운 파란색 버스 장난감이었는데, 아들이 장난감을 보고 신기해하며 따라다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다음 주 주말 아침 건전지를 넣고 한쪽 앉아 구석에서 책장을 슥슥 넘기며 그림을 보고 있는 아들에게 타요를 슬쩍 보내보았다. 뒤돌아서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하고 엉덩이를 톡톡 건드렸다. 그런데 웬걸, 아이는 혼자 움직이는 자동차를 보고 신기해서 따라다니기는커녕 금세 울상이 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 다리에 매달려 안아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안겨있는 아이는 한참이 지나도 내려가려 하지 않았고, 타요 장난감을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우고 나서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려갔다. 벌벌 떠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고, 예상치도 못한 반응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런 모습이 또 귀여워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이 짧은 순간에도 느낄 수 있구나 스스로 조금 신기했다. 한 달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 장난감을 바닥에 내어 놓으면 멀리서부터 경계하며 다가가지 않는다. 아이는 종종 반짝반짝 빛나는 티브이 셋탑박스가 들어있는 문갑을 열어 장난치고 하는데 몰래 타요를 넣어두면 황급히 닫고 멀찌감치 도망친다.(아이의 공포를 악용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아이가 서랍을 열어 위험한 전선을 만지는 걸 탁월하게 방지하는 중)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이 장난감과 우리 아들은 친해지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