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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암 Mar 03. 2022

차가울 수록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

맨하튼으로 향하는 전철과 도시에 대한 첫인상

하얀 증기를 뿜어대는 굴뚝과 끝없이 펼쳐진 주차장을 가득 매운 차량 그리고 나부끼는 성조기. 공항철도 차창밖의 겨울을 뒤로하고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역무원은 개찰구 한쪽에 기대어 짝다리를 짚은채 묻지 않아도 무엇을 찾는지 다 안다는 듯, 대답 없이 고개를 저어 턱으로 내가 사야 할 티켓 구매처를 가리켰다. 티켓을 팔고 있는 작은 매점의 점원 역시 별 말없이 무심한 듯 티켓을 건넬 뿐이었다. 개찰구를 통과해 짙은 회색 시멘트 계단을 내려와 도착한 하워드 비치역. 뉴욕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묵직한 캐리어를 들고 서 있는 여행자 서너 명과 맨해튼으로 가려는 뉴요커들, 그중 누구도 탁 트인 플랫폼에 서서 2월의 겨울바람에 맞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말없이 좁은 계단 앞에 모여 연거푸 입김을 뿜어대며 열차를 기다렸다.

뉴욕에 방문하기 전 두 달 동안, 내 업무용 컴퓨터의 배경화면은 찬란한 빛을 뿜어대는 엠파이어 스테이트와 그 뒤로 펼쳐진 맨해튼의 노을 지는 풍경이었다. 실존할 것 같지 않은 화려함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황홀감. 그 감정은 뉴욕을 이번 여행지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다. 남쪽에서 나고 자란 탓에 가끔 오는 눈이나 이불속에서 까먹는 귤 말고는 겨울의 좋은 점을 잘 떠올리지 못하는 우리 부부가 한겨울에도 여행을 떠나게 할 만큼 화려한 그 이미지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계단 한구석에서 추위에 떨며 아내와 여행에 대한 기대, 시차로 인한 피로, 가져온 핫팩의 개수 따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십여분이 흐를 때 즘, 요란한 금속음을 내며 낡은 열차가 밀려 들어왔다. 얼핏 지나가는 차 창안에는 예상과 다르게 제법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부피가 큰 여행용 가방을 각자 가지고 있었던 우리는 사람이 적은 앞쪽 객차를 골라 타기로 했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른 승객 서너 명도 우리와 함께 플랫폼을 내달려 제일 앞칸에 탑승했다. 객차 안에 들어서자 따뜻한 온기와 함께 알 수 없는 불쾌한 지린내가 코와 피부를 파고들었다. 순간 얼어 있던 볼을 녹이는 그 온기마저도 거북했다. 객석에는 혼자서 네댓 개의 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취객 한 명과 그런 모습의 취객을 일상의 한 부분으로 대하듯 아무렇지 않게 앉아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서로 거리를 두고 앉아있었다. 우리 부부가 큰 짐을 들고 함께 나란히 앉을만한 곳은 취객의 맞은편이 유일했다. 자리에 앉기 전, 의자와 나 사이에 이미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물질에 대한 불신을 한가득 품고 손으로 자리를 더듬어 만져보았다. 딱딱한 플라스틱 소재의 좌석에서 한겨울의 한기가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걱정하던 오물은 없었다. 건너편에 누운 취객은 깊은 잠에 빠졌는지 죽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낡고 해어진 어두운 색 옷을 겹겹이 입고 팔짱을 야무지게 낀 채 등받이를 뒤에 두고 우리 쪽을 바라보는 자세였다. 옷만큼 낡은 모자를 눈 밑까지 덮어쓰고, 더 낡은 구멍 난 양말과 샌들을 겹겹이 신었다. 주위의 소리와 반응을 완전히 차단하고 오로지 잠에만 집중했다. 미동조차 없던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한 이유는 간간히 코 고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몇 정거장을 지났지만 한번 생겨난 경계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옆에 두었던 가방을 다리 사이로 옮기고 손잡이를 올려 내 것과 아내의 것을 동시에 한 손에 꼭 쥐었다. 삐그덕 거리는 철문이 열릴 때마다 찬 공기와 함께 낯선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대부분은 말없이 빈자리 채우며 휴대폰을 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도 여러 명 섞여 있었다. 큰 헤드폰을 낀 채 자신이 듣고 있는 힙합 음악을 크게 따라 부르는 남자. 그는 속옷이 다 보일 정도로 바지를 내려 입고 노랫소리에 맞춰 까딱까딱 춤을 추었다. 객차 안에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맞은편에 누워 잠을 청하는 취객과 비슷했다. 그가 타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객차에 탑승한 백발의 여자는 자기 얼굴이 비치는 차창을 향해 큰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것도 아주 쉴 틈 없이, 강한 억양으로 말이다. 태어나서 생전 처음 접하는 기이하고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큰 덩치에 비해 근심과 걱정이 많은 내가 한국이라면 반드시 피했을 사람들과 같은 객차에 있는 것이었다. 낯선 곳에서 매우 낯선 이들과 매우 낯선 길은 떠나는 상황. 양손에 잡고 있던 짐가방의 손잡이를 더욱 새게 꼭 움켜잡았다.


우리 부부가 탄 전철에는 여러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면서 한적한 주택가를 지났고, 어느새 지하로 들어가 내달렸다. 처음부터 타고 있던 취객은 여전히 세상과 단절된 채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다행히 다른 수상하고 이상한 사람들은 도심이 가까워질수록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아니, 어쩌면 객차 내에 사람이 많아져서 그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어졌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전철은 한 시간 조금 덜 걸려서 목적지인 월스트리트 역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취객은 원래의 자리를 지키며 세상과 단절된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한눈에 봐도 깔끔하지는 않은 오래된 플랫폼에 열차가 멈춰 섰을 때, 서둘러 가방을 챙겨 아내와 함께 내렸다. 오랫동안 짐가방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이 저릿저릿했다. 역에서는 객차 내부에서 나던 냄새와는 또 다른 불쾌한 냄새가 났다. 거기에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한기는 밖의 날씨가 얼마나 매서울지 상상하게 했다. 에스컬레이터도 없는 낡고 좁은 계단을 양손에 짐을 들고 올랐다. 구석구석 묻어있는 오물과 쥐 시체 따위를 피해 걸으며 역을 빠져나왔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맑은 바깥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다행히 처음 만나는 바깥의 공기는 쾌적했다. 예상대로 한겨울의 바람이 묵직하게 차가웠지만, 한 시간 가량 느꼈던 불쾌함을 씻어내기에 적합한 온도와 냄새였다. 하늘엔 옅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 그래도 차가운 바람이 멈출 때면 드문드문 깔려있는 구름 사이로 따뜻한 햇살이 가끔 느껴졌다. 


우리 두 사람은 각자의 짐가방을 드르륵 끌며 오늘부터 며칠간 묵기로 예약한 월드센터 호텔로 향해 걸었다. 고풍스러운 교회 건물부터 하늘 높이 뻗은 사무용 빌딩과 이제 막 공사를 시작한 건물들이 같은 공간에 섞여있었다. 바람 때문에 잠깐 서있기도 힘든 추운 날이었지만 길에서 보이는 상점이나 공사현장에는 사람들의 활기가 느껴졌다.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돌리며 걸어 나가던 중 어느새 호텔 정문 앞에 닿았다. 실내에는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관광객들로 북적북적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순서가 돌아오기까지는 한참 걸렸고, 겨우 짐 맡기고는 영수증 비슷한 텍을 전해 받았다. 호텔을 떠나기 전 짐을 맡아주었던 직원이 언제쯤 체크인할 거냐고 물었다. 잠시 오늘 예정된 일정을 생각하고는 기분 좋은 웃음을 띄며 저녁 늦게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뉴욕의 전철은 첫인상이 썩 좋지 않았지만, 빠듯한 지갑 사정에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서둘러 역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 부부는 도시의 첫인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길을 걸었다. 한겨울 찬바람을 등지며 뒤로 걷기도 하고, 상대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서로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뒤늦게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행지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갑갑한 회사생활과 단조로운 시골 생활에 대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얼마간 더 걷다 보니 호텔에서 빨갛게 잠깐 녹았던 볼이 다시 꽁꽁 얼어가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패딩 주머니 속에서 더 따뜻해져 가는 아내의 손을 더 꼭 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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