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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암 May 07. 2023

'빠뿌'는 돌멩이입니다.

그런데 한국어는 아닙니다.

결혼 후 네덜란드에 정착한 친구 부부가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인사할 곳 많았을 텐데, 참 고맙게도 우리 가족과 보낼 시간도 따로 마련해 주어 만나기로 했다. 친구의 본가가 있는 대구와 교통이 그나마 편리한 안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국 생활은 오래 했지만 안동은 처음인 친구의 아내 T를 위해 병산서원을 구경하기로 했는데, 우리 가족의 추천이었다. 배롱나무의 꽃이 활짝 핀 여름에 방문해 좋은 기억이 있었던 장소인데, 지금처럼 이른 봄에는 처음이라 그때 우리 가족이 느낀 감상과 같은 느낌을 친구네 부부에게도 줄 수 있을지 약간은 의심스러웠지만 새 생명이 차오르는 봄의 기운을 믿으며 서원으로 향했다.


서원으로 향하는 길목 한편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 천천히 흐르고 있는 넓은 낙동강을 따라 편안히 걸을 수 있는 길이 나 있고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나트 막 한 언덕에서 낙동강을 내려보고 있는 서원이 나온다. 서원의 계단을 따라 올라 널찍한 마루에 앉아서 만대루 너머로 보이는 낙동강의 풍경이 일품인 곳인데, 들어서는 입구 좌측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천원지방의 옛 동양의 우주관을 표현한 깊은 뜻이 있는 연못이나 이제 겨우 두 번째 생일을 맞은 아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돌멩이 던지기 놀이의 대상일 뿐이었다.


작은 연못은 봄의 기운을 머금고 푸릇루픗한 물이끼가 올랐으며, 개구리 여러 마리가 한가로이 다리를 벌리고 둥둥 떠 있었다. 연못 주위는 흙바닥으로 우리 아들에게 적절한 크기의 돌멩이가 꽤 있었는데 연못과 돌의 조합을 보자마자 '빠뿌'를 연신 외치며 퐁당 놀이를 시작했다. 아들은 돌멩이를 무슨 이유에서인지 '빠뿌'라고 부르는데 자기 손에 꼭 들어갈 만한 작은 돌을 주워 물속에 퐁당 던지는 놀이를 좋아한다. 이른 아침의 개구리들의 때 아닌 수난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내와 친구를 서원 안으로 먼저 보내고 곧 따라갈 수 있을 줄만 알았던 나의 수난이 시작이었다.


주위의 '적절한' 크기의 돌멩이를 모두 다 줍고 나서는 '빠뿌'를 찾는 애타는 목소리는 더 커져만 갔고, 범위를 넓혀 서원 입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돌멩이를 모았다. 이 놀이를 거의 한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열정적으로 했는데, 30분 정도 하던 중에 혼자 서원을 구경온 외국 관광객이 아이의 행동을 귀엽게 보면서 슬그머니 물어봤다.


"Does '빠뿌' mean stone in Korean?"


열심히 '빠뿌'를 외치며 놀이하고 있는 아이를 뒤에 두고 잘못된 한국어 정보의 확산을 막기 위한 설명을 이어나갔고 귀여운 오해는 '돌'로 정정되었다. 관광객은 활짝 웃으며 작은 돌멩이 몇 개를 찾아와 아이 손에 꼭 쥐어 주었다. 그 후로도 30분가량 서원 입구에서 열심히 돌멩이를 연못에 던지던 우리 아이는 여러 사람의 이목을 끌었는데, 아까 그 관광객은 나갈 때도 여전히 '빠뿌'를 찾는 아이와 나를 보고 웃음 띈 눈인사를 하고 나갔고, 다른 여러 외국 관광객들이 아이에게 돌멩이를 찾아주고 나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빠뿌'놀이는 아내와 친구들이 돌아와서도 끝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의 강제 연행으로 마무리되었다. 서원 입구에서 눈물바다를 만들며 낙동강가에 가서야 겨우 울음을 그쳤고 강가에서는 다시 내 품에서 내려 '빠뿌'를 열심히 외치며 돌멩이를 강에 던졌다. 결국 신발이 물이 빠지면서 아내의 탄식과 함께 놀이는 또 강제 종료되었다. 이 열정과 끈기를 봐서는 오늘 나의 강제 연행이 없었다면 연못을 가득 채우는 문화재 훼손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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