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저학년 무렵 대구에 지하철이 생겼다. 탈 것에 관심이 많은 어린 남자아이는 대부분 그렇듯 처음 타는 탈 것에 묘한 쾌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멀리 여행을 혼자 갈 일도 없었던 당시의 나에게 철도 교통은 새로운 흥분을 안겨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표를 쓱 넣으면 열리는 개찰구, 반짝이는 금속 외형에 빨간색의 강렬한 색상, 미끄러지듯 선로를 달리는 승차감, 폭신한 벨벳 느낌의 긴 벤치형 좌석, 역마다 나오는 방송, 무엇하나 즐겁고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두류동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한참 걸어서 도착한 성당못 역에서 새로 이사 갈 집에서 제일 가까웠던 진천역 종점까지 쉴 틈도 없이 감탄하며 엄마를 연신 불러 댔다. 사실 이사 갈 집은 지금의 화원역 근처라, 진천에서는 꽤 먼 거리라 지하철을 타고 갈 필요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당시에 지하철이라는 새로운 녀석을 어린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중에 커가면서 대구 지하철 1호선이 연장되고, 다니던 대학교 앞에 까지 2호선이 개통되고 하면서 지하철은 생활의 평범한 일상이 되었고 종점에서 앉아서 종점까지 가는 긴 여정동안 책이나 읽으며 졸리면 졸고 하는 그런 지루함의 공간이었다. 더 시간이 흘러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자가용이 생기니 버스나 지하철 가격을 모르는 정치인들이 간혹 이해가 가기도 할 정도로 생소한 교통수단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단양으로 이사를 해보니 대중교통 이용도는 더 낮아져 모든 이동을 자가용으로 하게 되었다.
물론 새로 태어난 아이들도 버스며 기차며 어떤 것도 타보지 못한 교통 촌놈이 되어버렸는데, 얼마 전에 십 년째 타던 오래된 고물 자동차가 밀양 언저리에서 멈춰 서버렸다. 근처에 수리를 일주일 간 맡겨 놓고 찾으러 가는 날, 단양에서 기차며 버스며 온갖 수단으로 동대구 역까지 아들과 같이 왔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에 인수 가능 시간도 확인 안 한 덜렁거리는 성격 덕에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진천역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점심도 먹고 인사도 하고, 증손자도 보여드리고 할 겸 오랜만에 지하철에 올랐다.
이미 기차며, 고속버스며 온갖 신문물을 하루 만에 경험한 흥분한 아들이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더니 더 신나 하는 것이 보였다. 삑 소리가 나는 개찰구부터, 에스컬레이터, 역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의 모습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우와' 하는 감탄사와 '신기하다' 하며 귀엽게 말하는 소리에 웃음이 났다. 출입문 쪽 좌석에 앉아서 몸을 뒤로 돌려 계속 차창밖을 바라보고, 드나드는 사람을 보고 '아빠 아빠 저것 보세요' 하면서 신기한 걸 알려주기도 하는 아들. 문득 그날의 엄마가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하며 일찍 떠나간 엄마를 떠올려 봤다.
오랜만에 탄 지하철 1호선의 노선도는 여기저기 수정 스티커가 잔뜩 붙어있었다. 역 이름이 바뀐 곳도 있었고, 종점에서 몇 정거장 더 연장된 곳도 있었다. 덕지덕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노선도. 긴 세월 동안 어른이 되면서 노선도처럼 이리저리 뗌 질 된 아저씨의 몸과 마음으로 올랐던 지하철에서 아들과 함께 짧은 30분 동안의 여정에 잊고 있었던 작은 추억과 동심과 애정을 다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