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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동동 Apr 07. 2024

아줌마, 히치하이크를 하다

(2023년의 여행 기록입니다.)


  호미곶을 가는 길이었다. 포항경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호미곶으로 가는 버스를 검색했다. 그런데 교통편이 좋지 않았다. 바로 가는 버스는 없고 한 번은 갈아타야 하는데, 뭔가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망설이는 사이 버스가 와서 일단 올라탔다. 이 버스를 타고 다섯 정거장 정도를 가서 내려 환승하고,,, 좋아, 어렵지 않아. 버스를 타고 다섯 정류장 정도 갔을까? 환승해야 한다고 카카오맵이 가르쳐 준 정류장이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주변은 시골 읍내처럼 보였지만, 버스 정류장만은 상당히 현대적이었다. 갈아타야 할 버스 번호가 적혀 있는 걸 보니 안심이 되었다. 조금 기다리면 오겠지. 잠시 기다리는 사이 다른 번호를 단 마을버스가 섰다. 혹시나 싶어 정류소의 버스 노선표를 샅샅이 봤지만, 그 버스는 내가 가는 방향이 아니었다. 버스를 보내고 다시 기다렸지만, 내가 타야 할 번호의 버스가 올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슬슬 조바심이 일었다. 그냥 걸어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류장 의자에 함께 앉아 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내가 탈 버스 번호를 말하며 그 버스가 여기 정차하는 게 맞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맞다고 하시며 어디를 가냐고 물으셨다. 호미곶 둘레길을 가려고 한다 했더니 사방팔방이 다 둘레길인데 둘레길 어디? 하는 말이 날아왔다. 맞는 말이었다. 연오랑세오녀 테마 공원이라고 초점을 좀 더 좁혀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혹시 걸어갈 수 있냐고 했더니 거긴 도저히 걸어서 못 간다고 손사레를 치셨다. 그럼 버스가 오긴 오냐고 했더니 오긴 오니까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나 기다리냐고 했더니 좀 기다리면 온다고 했다. 카카오맵을 아무리 새로고침하고, 버스 노선표를 노려봐도 버스가 빨리 올 것도 아니고, 걸어갈 거리도 아니라고 하니 별 수 없었다. 그냥 기다릴 수밖에. 어쩐지 막막했다.  


  그때, 하얀 아반떼 한 대가 정류장 옆에 서더니, 싹싹한 이미지의 단발머리 중년 여성이 차창으로 “아버지, 아직 거기 서 있어요? 이거 타요!” 했다. 보아하니 버스 정류장에 같이 서 있던 할아버지 한 분한테 말하는 듯했는데, 그 여성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할아버지 얼굴은 가타부타 표정 변화가 없었다. “됐어, 됐어, 이거 타. 내가 태워주께.” 하며 차에서 내린 딸이 아버지 팔을 잡아끌다시피 차로 모셔가려 했다. 할아버지는 뜨뜻미지근하게 거부하시다가 못 이기는 척 차 쪽으로 움직이셨다. 그런데 옆에 있던 할머니들이 갑자기 나를 찌르더니, “저거 같이 타고 가.” 하셨다. “예?” 놀라서 물으니, “저 할아버지도 그쪽으로 가는 거야. 같이 타고 가.” 하시는 거였다. “아니, 괜찮아요. 버스 기다렸다 타고 갈게요.” 했더니, “아, 타고 가. 괜찮아.” 하셨다. 할머니들이야 괜찮으실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그런 내 마음도 꿰뚫어 보시는지, 할아버지를 보고 “이 처자도 태워 가면 되겠네.” 하셨다. 딸 차로 향하던 할아버지는 나를 흘끗 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인 듯도 했다. 역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어쨌든 안된다는 말을 안 하신 것만은 분명했다. 할머니들은 이제 등을 떠미는 시늉까지 하며 어서 따라가라고 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언제 올지 모르겠고... 그냥 모르는 척 얻어타기로 했다. 아줌마력을 발휘해 잠시 얼굴에 철판 좀 깔면 몸이 편해질 터였다. 할아버지 뒤를 약간 사이를 두고 꼬리처럼 졸졸 따라갔다. 할아버지가 흰색 아반떼 옆에 다다라서는 바쁘게 차 안을 정리하는 딸한테, “타고 가다 이 사람 좀 내려 줘.” 했다. 그 소리에 놀라 딸이 얼굴을 들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했다. 딸이 어벙벙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느닷없이 나타난 이 낯선 사람은 누군가하고 경계하는 게 얼굴에 너무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 딸은 할아버지에게 “이 사람이 누군데?” 했다. 할아버지는 “거, 바닷가 간대. 공원 있잖아. 가다가 내려줘.” 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한 웃음을 띠고 공손한 목소리로, “저, 서울에서 왔는데요. 수상한 사람 아니구요. 호미곶 둘레길을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는데요, 어르신께서 같은 방향이라고 태워주신다고 해서요. 죄송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아침부터 강도짓을 할 범죄자 인상은 아니라서 그런지, 아니면, 딱 봐도 세상 물정 모르는 아줌마라는 게 너무 표가 나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불쌍해서 그런 건지, 마침내 그 천사같은 따님은 “아, 예, 타세요. 그런데 뒷좌석에 짐이 많아서...”라고 떨떠름하게 말했다. 나는 “아유, 정말 감사합니다. 저야 태워주시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죠.” 하며 넉살 좋게 차 뒷문을 열고 올라탔다. 뒷좌석에는 정말 짐이 가득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간신히 사람 한 명을 구겨 넣을 만큼의 공간은 있었다. 나는 등에 멘 배낭과 함께 찌그러져 시트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았다. 경계심을 약간 푼 듯한 딸은 운전하면서 중년의 서울 아줌마가 왜 평일 아침에 혼자 배낭을 배고 호미곶에 가겠다고 그 정류소에 있는 건지, 정확히 어디를 가는 건지 물었다. 나는 나홀로 여행을 감행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나홀로 여행이라는 말에 딸이 말했다. “멋있네요!”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나홀로’ 문화가 많이 보편화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 단어는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걸까? 중년의 아줌마인 내가 혼자서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심지어 여행을 한다고 하면 다들 ‘대단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유별나다기보다는 ‘멋지다’라는 뉘앙스에 가까웠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어쩐지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남들이 가지지 않은 뭔가 귀중한 것을 지닌 것처럼 여겨졌다. 생각해 보면 신기했다. 밖에 나가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하는 행위 자체에는 전혀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그걸 혼자 한다고 하면 그때부터 그런 일상적인 행위가 특별함을 지닌 무언가로 바뀌는 것이다. 잘 알려진 국내 관광지로 떠나는 일이 세계 어느 구석의 오지로 가는 것만큼의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로 취급받는다. 그렇게 본다면 인생에서 기쁨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매일 하는 일이라도 한번 혼자 시도해 보는 것과 같은 작은 변화만으로도 얼마든지 일상에서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연오랑세오녀 테마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이 가까이 오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딸이 나에게 이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해파랑길을 따라 하선대에 가 볼 생각이라고 하자 공원에서 해파랑길로 이어지는 길도 간단하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주차장에 다다라 사례를 하겠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고는 나를 내려주고 흰색 아반떼는 다시 바삐 떠났다. 즐거운 여행하라는 말을 남기고. 

 


  공원 주차장에서 보는 11월의 파란 바다는 너무 아름다웠다. 평일 오전이라 공원에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낯선 곳에 홀로 있었지만, 별로 겁나지 않았다. 나는 이곳까지 혼자 왔다. 방금 생전 처음 히치하이크도 해 봤다. 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도 독차지하고 있다. 나는 속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새로운 ‘나’에 대한 설레임이었다. 이번 여행은 즐거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건 확신에 가까웠다. 그래, “즐거운 여행을 하자.” 나는 주차장에서 바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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