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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동동 Jun 20. 2024

전기도 물도 끊긴 날

정전의 추억

  몇 주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큰 공고문이 붙었다. 아파트 변전실 내 변압기의 절연유를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정전 및 단수가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날이 오늘이다. 오늘 낮 기온은 35도. 어제에 이어 올해 중 가장 더운 날이다. 어제 아파트 주민 단톡방에는 하필 이렇게 더운 날 공사를 하는 거냐며 불만이 폭주했지만, 아파트 측도 날씨가 이럴 줄 알 리는 없었을 테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정전에 단수가 동시에 된다니 큰일은 큰일이었다. 솔직히 단수보다 정전이 더 신경 쓰였다. 단수야 물탱크 청소할 때마다 겪는 일이고 물 좀 받아두면 되니까 크게 번거롭진 않았다. 하지만 정전은 차원이 달랐다. 처음 ‘정전’이라고 했을 땐, ‘화장실 들어갈 때 불을 못 켜니까 깜깜하겠네’ 정도의 감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젯밤, 막 잠이 들려다가, ‘참, (정전이 되면) 냉장고가 멈추지.’하는 생각이 머리를 세게 쳤다.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급히 머릿속을 더듬어 봤다. ‘야채, 과일... ’ 그러다가 냉동실의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 통에서 생각이 딱 멈추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가서 남편에게 소리쳤다. “당신, 내일 아침 후식으로 과일 대신 아이스크림 좀 먹어요.” TV를 보고 있던 남편은 느닷없는 말에 어벙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나?’ 남편 얼굴에 쓰여 있었다. 내가 정전 때문에 이러저러하다 하니까, 그제야 별 것 아니라는 어투로 “문제없어”하더니 이내 다시 눈을 TV로 돌렸다. 아이스크림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한시름 던 기분이었다. 이제 잘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은 드물지만 어릴 때는 정전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TV 볼 때 정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못 본 부분이 궁금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엄마한테 몇 번이나 ‘불 들어오면 아까 보던 부분부터 이어서 다시 나오는 거냐’고 물었다. 엄마는 귀찮은 듯이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마침내 불이 들어와서 얼른 TV를 틀어보면 아까 보던 방송은 끝나고 다른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엄마한테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면, 엄마는 이제 TV는 그만 보고 자라거나 혹은 공부나 좀 하라는 말로 우리 입을 막아 버렸다.

  그때는 정전은 재미있는 깜짝쇼 같았다. 둥근 상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다가 전등이 꺼지면 엄마는 양초를 가져다가 불을 붙였다. 주변은 갑자기 어두워지고 늘 보던 벽과 가구가 달리 보였다. 일렁이는 촛불에 비친 그림자는 평소보다 더 크고 짙어 보였다. 동생들과 손가락으로 그림자놀이를 하기도 하고 귀신 흉내도 내다보면 어느새 환하게 불이 다시 들어왔다. 왕왕 불이 나갔기 때문에 엄마는 양초와 성냥을 집안 상비품으로 항상 서랍에 챙겨두었다.


  신혼 초 살았던 오피스텔도 정전이 잦았다. 신축이라 아직 시스템이 불안정해서 그런 건지 한 번씩 불이 다 나가 버렸다. 남편은 한창 퇴근이 늦을 때라 정전은 주로 혼자 경험했다. 그 오피스텔은 긴 원룸형으로 창문이라고는 침대 옆에 큰 창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불이 꺼지면 바깥 빛이 전혀 닿지 않는 현관 쪽은 아주 어두웠다. 한 번은 비 내리는 어스름에 정전이 되었다. 그날따라 실내는 더 조용하고 빛이 닿지 않는 현관 쪽은 유난히 어둡게 느껴졌다. 다 큰 어른이었지만 어둠을 무릅쓰고 현관을 나가 오피스텔 밖으로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저녁 빛에 의지해 전기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요즘은 정전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여름처럼 전력 사용량이 많이 늘 때면 가끔 대규모 정전 사태가 보도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가 그런 일을 겪은 적은 없다. 아무리 허름한 집이어도 난방이나 배관 문제는 있을망정, 정전 때문에 말썽이 난 경우는 없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정전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할 지경이었다. 정전을 대비해 양초와 성냥을 대비하던 때가 있었다는 기억도 가물가물해졌다. 전기처럼 당연한 것이 있을까? 그건 숨 쉬는 공기 같은 거였다. 전기로 움직이는 것들은 일일이 생각해 내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많았다.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한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정전 자체는 번거로웠지만 살짝 반갑고 그리운 느낌도 있었다. 그래서 폭염 예보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한번 버티어 볼까 싶었다. 모든 것이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고 부족했어도 그 나름대로 충분히 즐거웠던 그때 그 시절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기도 했다. 마치 소풍 전날처럼 약간은 설레는, 그런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눈을 뜨니 이른 시간부터 열기가 심상치 않았다. 벌써 공기가 오븐 안처럼 화끈했다.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망설이다가 갑자기 엘리베이터 생각이 났다. 우리 집은 13층이다. 그 말은 한 번 내려가면 13층까지 걸어 올라와야 한다는 소리다. 다르게 말하면 이 더위에 고생 않으려면 엘리베이터가 다시 가동될 때까지 내려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 이건 생각보다 더 불편한데? 그냥 나가 버릴까? 마음이 갈팡질팡하는데 9시 30분이 되었다. 그 순간, 마치 마법처럼 인터넷이 끊겼다. 맞다, 공유기도 전기를 쓰는 거였지! 갑자기 집에서 못 버틸 것 같았다. 더 이상 고민되지 않았다. 부랴부랴 가방을 쌌다. 전등도 냉장고도 에어컨도, 그리고 인터넷도 되지 않는다니! 기분 탓인지 더위도 더 심해진 것 같았다. 현관문을 나서니 이미 불 꺼진 엘리베이터가 나를 맞았다.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정전의 추억은 다른 시원한 날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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