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세입자
(압구정 아파트를 샀을 때 우리는 다른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계약 상의 문제로 우리는 입주하기 전 아파트를 한 번 세 놓게 되었다. 이것은 그때 만난 세입자에 대한 이야기다.)
“먼저, 저는 이분과는 일말의 관계도 없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단지 우리 거래인을 대리할 뿐입니다. 그분은 오늘 일이 바쁘셔서 못 나오셨는데, 이 말만은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잠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말을 이었다.
“살다 살다 이런 악덕 집주인은 처음 봅니다.”
내 귀를 의심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정면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나는 혹시 이 말이 세입자가 아니라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중개사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세가 싸지도 않은데(…), 이사 날짜도 일방적으로 계속 바꾸고(…), 연락을 독촉하고(…), 그래서 내가 손해가 막심…….”
어쩌고저쩌고 내용이 계속 이어졌지만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진상이 누군데?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린데? 그동안 배려해 준 걸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세입자님의 말씀’이 끝났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 입장 좀 이야기할까요?”
“아니요. 저는 듣지 않겠습니다!”
상대편 중개사는 내 말을 싹둑 잘랐다. 그리고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고개를 홱 돌리고는 서류를 꺼내 펼쳤다. 나는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는 거만했다. 살면서 그렇게 거만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사업가로 짐작되었는데, 아마도 세금 때문이겠지만 따로 자기 명의 집은 보유하지 않고 계속 세만 사는 듯했다. 압구정 이전에는 잠실에서 살았다고 했다. 압구정은 ‘교통이 좋아 보여’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지독하게 연락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공동 중개였기 때문에 부동산이 두 군데라 연락이 좀 더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정말 연락이 힘들었다. 답변이 제때 오지 않아 속이 터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는 정식 계약 이전에 가계약금이라는 것이 있는데, 계약을 선점하기 위해 돈을 걸어두는 거였다. 가계약금은 관행일 뿐 정식 절차가 아니어서 금액에 대한 규정은 따로 없었지만, 보통 계약금의 10%를 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세입자는 10%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돈을 보내고는 시치미를 뚝 뗐다. 예를 들면 가계약금으로 500만 원을 보내야 하는데 300만 원만 보내고는 연락두절이었던 거다. 돈을 더 보내야 한다고, 금액이 부족하다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나중에는 계약을 취소하고 싶으니 돈을 돌려주겠다고 해도 이 또한 대답이 없었다. 결국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 시간이 갔고 계약일이 되어 버려, 그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세입자’라는 사람이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과연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까지 행동이 제멋대로일까?
계약 당일에 나타난 세입자는 마치 티브이 드라마에 나오는 탤런트 같았다. 잘생긴 얼굴에 당당한 체격,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 그는 순식간에 주변을 압도했다. 그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자리에 털썩 앉더니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자기 측 중개사에게 “실장님, 여기 물 한 잔 좀 갖다 주세요.” 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는 듯한 말투였다. 세입자 측 중개사는 그 말에 “예~”하며 즉각 일어났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공손해 보이던지 남편과 나는 이 세입자가 저 부동산의 큰 손 고객인 게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그렇게 물을 한 잔 꿀꺽 마시더니, 세입자는 이번에는 우리를 보고 말했다.
“어차피 계약일에 볼 텐데, 왜 그렇게 자주 문자를 보내고 연락을 하라 말라 사람을 귀찮게 하고 그럽니까?”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숫제 부하 직원을 야단치는 사장님이었다. 남편과 나, 우리 측 중개사까지 모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쭈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그 말을 들었다. 우리가 자꾸 연락한 게 큰 잘못처럼 여겨졌다. 계약하는 내내 그는 그런 태도였다. 자기 측 중개사를 마치 비서 부리듯 했고, 이것저것 거침없이 물어봤다. 그때마다 그의 중개사는 공손한 태도로 잔심부름을 하고 대답을 했다. 우리도 기가 팍 죽어 모기만 한 소리로 ‘네네’ 하기만 했다.
계약은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특약으로 그는 한 가지 사항을 원했다. 그의 이사 예정일은 3월이었는데, 그는 계약 만료 기간을 2달 연장해서 5월로 하면 안 되겠냐는 거였다. 3월은 이사 수요가 많아 집을 찾기도 힘들고 이사비도 오른다는 거였다. 어차피 그가 나간 다음 우리가 들어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라고 했다. 우리 집주인에게는 미리 통보하기만 하면 별 탈이 없을 터였다. 이렇게 특약 사항을 마무리 지은 후 그와 우리는 계약서에 최종 서명을 했다. 그제야 세입자는 너그러운 미소를 띠며 자기는 출장이 많아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을 거라 집주인으로서는 편할 거라고 말했다. 마치 회사에서 큰 거래 뒤 사장이 직원에게 “수고했어” 하며 어깨를 툭툭 치는 듯한 품이었다. 그리고서 그는 ‘급한 일’이 있다며 자기 중개사와 함께 먼저 자리를 떴다. 뒤에는 우리만 덩그러니 남았다.
기분이 복잡했다. 계약이 잘 끝났건만 후련하지 않았다. 세입자에게 완전히 휘둘린 듯한 느낌이었다. 누가 집주인이고 세입자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반드시 집주인이 갑이고 세입자가 을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는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남편과 나는 부동산을 나오면서 씁쓸하게 말했다.
“압구정은 세입자도 저런 사람들이 들어오는 거야?”
정말 자기 말처럼 집에 잘 없는지 세입자는 계약 기간 동안 대체로 조용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확실히 ‘착한’ 세입자였다. 계약 종료가 다가올 때쯤에는 계약 때 인상이 좀 그렇긴 했지만 이만하면 100점짜리 세입자에 대해 내가 너무 박하게 생각한 건 아닌지 괜스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곧 깨어졌다.
애초에 이사에 편하다고 5월로 계약 만료일을 조정했으면 했던 쪽은 세입자였다. 그런데 그 사이 부동산 시장 상황이 바뀌자 말을 뒤집었다. 2월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오더니 좋은 전세 매물이 나와 이사를 하고 싶은데 보증금을 줄 수 있냐는 거였다. 당연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부터 세입자와 이사 날짜를 두고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우리 측에서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일찍 이사 들어가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 우리 집주인에게 이야기해 새로 들어올 사람을 구하고 살고 있던 집에서 나갈 날짜를 정했다. 그런데 마냥 급하게 보이던 세입자는 우리가 보증금이 마련되었다고 연락하자 그때서야 집을 알아보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세입자를 배려해 주려다가 우리만 집이 없는 상태로 한동안 붕 뜨게 되어 버린 거였다. 서로 말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점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부동산이 두 군데나 끼어 있었다는 점도 큰 몫을 했다. 부동산들은 절대 세입자와 우리가 직접 말을 섞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말이 두 다리씩 건너갔다 올 때마다 꼬이기만 했다. 결국 간신히 날짜 조정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세입자와 우리 모두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마침내 보증금 반환일 당일, 우리는 세입자를 다시 볼 생각에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갔다. 하지만 그날 부동산에 세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매우 바쁘다’며 대신 세입자 측 중개사만 나왔다. 그는 끝까지 ‘바쁜 회장님’이었던 거다. 잔뜩 기합을 넣었던 것이 허탈해 앉아 있는데, 세입자 측 중개사가 ‘그분의 말씀’이라며 최후의 일격을 우리한테 날렸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던져 놓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세입자와, 그 세입자한테 빙의라도 한 듯한 그의 중개사, 세입자와 우리의 싸움은 명백히 세입자의 승이었다. 보증금 반환까지 끝나고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우리 모습이 자기가 보기에도 안쓰러웠는지 우리 측 중개사가 말했다.
“그래도 이제 그 사람하고 계약이 끝났잖아요. 좋게 생각해요. 내가 이 동네에서 거래하면서 별별 사람 다 봤어.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었다.
불행히도 그 세입자와는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이 집으로 이사 들어온 후 해를 넘겨서도 여전히 그의 이름으로 택배와 우편물이 날아왔다. 나는 그때마다 아무 말 없이 정중하게 그에게 문자로 알려주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나중에는 그도 무안했던지 ‘죄송합니다. 주소 이전을 한다고 했는데 누락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며 ‘살다 살다 처음 본다던’ ‘악덕 집주인’에게 답을 보냈다.
과연 그 세입자와는 악연이었던 걸까? 어쨌든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압구정 아니면 어디서 그런 사람을 또 만나볼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하면 우리에게 그는 압구정이란 곳에 들어가기 위한 또 다른 호된 신고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