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몸 쓰는 알바 인생
지난주부터 초등학교 우유 배식 알바를 하고 있다. 당근에서 찾은 알바다. 알바 시간이 6시 30분에서 8시인데,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나한테 딱 맞다. 단순노동이고 혼자 하는 일이라는 점도 좋다. 일하기에 따라 빨리 끝내면 집에 빨리 갈 수 있다는 사실도 장점이다. 하지만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은 학교 일이라 주말과 공휴일에는 쉴 수 있고 방학도 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붙을지 자신이 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지원 문자를 보냈는데 덜컥 일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자녀 교육이 끝나면 인생 꽃길일 줄 알았다. 예전에 누군가 말했다. 50대가 제일 좋을 때라고. 그 이유는 자녀 교육은 끝났고, 아직 건강할 때이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그러니까 이때 여행도 가고 실컷 놀아야 한다고 했다. 조금 지나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부모님도 병원 다니시고 자녀들 결혼이다, 출산이다 해서 시간이 안 난다는 거였다. 그때 그 말을 한 사람은 남편 회사 동료 부인이었는데 나이가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 위였다. 지금 생각하면 나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그때였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모든 게 너무 많이, 너무 빨리 변했다.
요즘 자녀가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자식 뒷바라지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자녀가 대학에 가도 여전히 돈이 든다. 오히려 돈이 더 들기도 한다. 용돈에, 이것저것 자격증 준비에, 방학에는 너도나도 여행까지 간다. 물론 자기가 알바해서 번 돈으로 비용을 충당하는 기특한 경우도 많지만, 여하튼 대학생이 되어도 돈이 많이 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취업을 하면 상황이 나아질까? 글쎄,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천정부지 집값 때문에 독립은 요원하다. 부모도 자녀가 고생하는 것이 마음 쓰이고 자녀들도 집에서 나가지 않으려 하는 판이다. 결혼의 경우, 돈 드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부모님 부양은 또 다른 부담이다. 굳이 뉴스에서 초고령 사회라고 떠들지 않아도 주변을 둘러보면 팔순 부모님이 너무 흔하다. 요즘 환갑은 나이 든 취급도 받지 못한다. 문제는 본인도 나이를 먹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는데, 더 늙으신 부모님까지 모셔야 한다는 사실이다. ‘노노(老老) 봉양’이다. 그나마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면 다행이지만, 어지간한 경제력으로는 120세까지 언급하는 긴 수명을 대비하기란 힘들다. 그런 경우 결국 긴 수명은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돈 없는 장수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 모든 건 사실 경제적으로 넉넉하다면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기가 남편 퇴직과 딱 맞물리는 때라는 사실이다. 50대에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말했던 분은 다행히 남편 퇴직 전에 위의 모든 인생 숙제를 끝낸 케이스였다. 자식 공부도 끝냈고, 취업도 시켰고, 결혼에 손주까지 보았다. 게다가 그분 남편은 퇴직 후 다른 직장으로 성공적으로 옮겨가기까지 했다. 솔직히 부럽다. 하지만 이분의 경우 나보다 조금 윗세대라는 점도 행운으로 작용했다. 저출산, 고령화, 취업난 등의 폭격이 내리기 전에 인생 중대사들을 다 해치우고 피할 수 있었던 거다.
그분과 불과 몇 살 차이 날 뿐인데 나에게는 위의 모든 일이 고스란히 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심지어 그 무게는 갈수록 더 무겁게 느껴진다. 인생 과업 중 내가 한 건 아직 ‘자식 대학 보내기’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남편 퇴직도 걱정해야 한다. 저 이야기가 나왔던 때만 해도 남편은 아직 젊었고, 퇴직 이야기는 술자리 안주 삼아 나오는 주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퇴직이 진짜 코앞에 닥친 느낌이다. 남편이 퇴직하면 어떻게 될까? 남편 나이에 재취업은 거의 안 된다고 봐야 할 테고, 그렇다고 경험도 기술도 없이 우리가 갑자기 창업에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명은 길어져서 120세, 아니 못해도 100세까지는 각오해야 하는데 이렇게 긴 수명,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은 한가득이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없다. 내가 알바 자리라도 뒤적거리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들 사는 게 비슷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무언가를 하고 있다. 한 친한 지인은 유치원과 학교로 돌봄 일을 나간다. 아래층 이웃은 학원 차량 동승 도우미 일을 한다. 아들 학교 동창 엄마는 작년 내내 내일 배움 카드로 간호조무사 학원을 다니더니 올해 자격증을 땄다. 아는 언니는 몇 년째 맥도널드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젠 제법 고참 베테랑 대접을 받는다고 했다. 다들 내 또래이거나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정도다. 사는 곳도 압구정, 강남이나 강남에 준하는 지역이다. 외부에서 볼 때 강남은 부유한 특권층 동네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강남에 산다고 다 부자인 건 아니다. 당장 먹고사는 걱정은 없다 해도 노후가 걱정되기는 매한가지다. 그래서 자녀 교육만 끝나면, 아니 그전이라도 시간만 난다면 알바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강남 엄마들이 많다.
강남 엄마들이라고 해서 멋지게 차려입고 영어 쓰는 알바를 하는 건 아니다. 정확한 통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강남 엄마들이 가장 많이 하는 알바는 ‘학원 상담 실장’과 ‘등하원 도우미’인 것 같다. 둘 다 교육, 돌봄과 관련된 일이다. 납득이 간다. 예전에 일을 했던 아니던 오랫동안 집에서 아이 교육에만 몰두한 전업주부라면 자격증이나 경력이 필요한 일에는 지원할 엄두조차 나지 않기 마련이다. 그나마 아이 보육이나 교육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동안 쌓은 ‘경험치’가 있으니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자리에 엄마들이 몰리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이런 일들은 대우가 좋지 않다. ‘학원 상담 실장’은 그럴듯한 직함과는 별개로 실제는 최저 시급에 주말 근무는 기본 포함이다. 가끔 진상 학부모도 상대해야 한다. 등하원 도우미는 최저 시급은 아니지만 대개 ‘간단한 가사’ 혹은 ‘밥 먹여 주시고’, ‘놀아주시고’ 등의 조건이 딸려 오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가사 도우미 일과 경계가 흐려지기 쉽다. 결국 ‘등하원 도우미’라고 하지만 가사 일에 보육, 어떨 때는 아이 숙제까지 봐줘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강남 살면서 가사 도우미라니’라고 생각하면 서글픈 감정도 든다. 열심히 산 대가가 결국 이건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일조차 경쟁이 치열하다. 원한다고 해서 언제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나이가 더 들면 이 일조차도 잡기 힘들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들 사는 모습이 비슷하다. 오히려 나갈 곳이 있다고, 할 일이 있다고 즐거운 얼굴인 사람들도 많다.
나도 학원 상담 실장직에 몇 번 지원해 봤다. 하지만 한 번도 된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다. 지금까지 여러 알바를 거쳐본 경험으로 나는 서비스직에는 맞지 않는다. 의욕은 넘치지만 무슨 까닭인지 좋게 끝난 적이 없다. 그러니 사람을 대할 필요가 없는 초등학교 우유 배분 일은 나에게 딱 맞는 일이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번 일의 목표는 학기 말까지 끝까지 가 보는 거다. 강남 아줌마라고, 압구정 산다고 별거 없다. 노후는 누구에게나 두렵다. 일을 하고 있으면 그 두려움이 조금은 가신다. 얼마 안 되는 돈이어도 그렇다. 언젠가 나한테 정말 맞는 일을 찾을 수도 있을 거다. 그때까지 조금이나마 숨 돌릴 틈을 얻은 느낌이다. 이제 첫 주는 무사히 마쳤다. 다음 주도 힘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