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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동동 Nov 21. 2024

수능날 아침 도로 정체를 겪으며

나의 학력고사를 추억한다

  우리나라의 수능 날은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다.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의 등교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관공서의 출근 시간 조정은 기본이다. 주식 시장도 늦게 개장한다. 버스들도 모두 노선에서 지나가는 고사장 이름을 붙인다. 심지어 듣기 평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비행기 이착륙까지 통제할 정도다. 해마다 외국 언론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한국만의 진귀한 현상’이라며 보도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정작 한국인인 나는 이 ‘수능날 아침’을 경험한 적이 없다. 보통 수능 당일 오전에는 아예 집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수능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게 없다. 아들이 외국 대학으로 진학한 덕분에 수능을 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능 초콜릿을 받은 일도, 수능 당일 아침에 도시락을 싸느라고 부산을 떤 기억도 없다. 내가 수능 아침 풍경에 대해 아는 것은 뉴스에서 보고 주변에서 들은 게 다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비단 아들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나 역시 대학 시험 당일 아침 풍경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다.  






  나는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다. 그다음 해부터 수능이라는 새로운 시험 제도가 실시된다고 해서 그해 재수생들이 대거 몰렸다. 학력고사와 수능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지만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학력고사는 선지원 후시험, 수능은 선시험 후지원이라는 점이었다. 즉 학력고사 제도에서는 원서를 지원하는 대학의 지원하는 과에 딱 한 장만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원서 접수 마감일에는 조금이라도 경쟁률 낮은 과로 원서를 내려는 눈치 싸움이 어마어마하게 벌어지곤 했다.     


  나의 모교는 부산 구석에 위치한 작은 사립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우리가 고작 3회 입학생이었다. 대학 합격률을 높여 입지를 제대로 다지는 게 가장 중요했던 학교는 새로운 입시 제도에 운을 걸어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제도가 바뀌기 전에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대학을 보내는 것만이 가장 중요했다. 이런 사정으로 학교 측은 우리들에게 하향 지원을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원래도 대입 지원에 개개인의 적성은 그다지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지만, 그해에는 더욱 무시되었다. 그렇게 앞뒤 살피지 않고 무조건 하향 지원을 밀어붙인 결과, 그해 우리 학교의 대학 진학률은 눈부셨다. 하지만 전체 고3 중 서울로 지원한 사람은 5명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 이과는 1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부산에 있는 학교로만 지원했다. 나보다 훨씬 공부를 잘하던 친구들이 아무도 서울로 원서조차 쓰지 않은 걸 생각하면 지금 돌아봐도 아쉽다. 비록 부산 내에서 일망정 약대, 한의대 등 좋은 과로 진학하긴 했지만, 그들에게 다른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한편, 문과에서는 과 수석과 1년 장학금 수상자가 넘쳐났다. 심지어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는 이야기조차 드물지 않았다.       


  나는 그 5명의 예외 중 한 명이었다. 원래는 나도 안전하게 부산의 대학에 지원할 생각이었다. 원서 접수 첫날, 일찌감치 작성을 끝낸 원서를 들고 같은 학교에 지원하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나서려고 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원서 접수 기간만큼은 대학에 원서를 내고 나서 바로 집으로 가는 걸 허락했다. 그러면 으레 같은 대학에 지원하는 아이들끼리 모여서 원서를 내고 놀러 가곤 했다. 나도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담임이 급히 달려와 나를 붙잡았다. 엄마가 교무실에 전화를 걸어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다는 거였다.      


  나에 대한 기대가 컸던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내가 서울로 가기를 강력히 원하셨다. 당시 내 점수로 부산의 대학은 굉장히 안정권이었고, 서울의 대학은 간당간당했다. 나는 도박을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렇게 부모님과 싸우느라 원서 접수 기간을 모조리 다 보냈다. 결국 마지막 날 엄마가 나 대신 원서를 들고 서울로 떠났다. 교무실에서 담임이 엄마와 나 앞에서 원서를 다시 쓸 때 나는 옆에서 계속 엉엉 울었다. 평소라면 창피해서라도, 담임이 무서워서라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텐데, 엄마도 옆에 있겠다, 수험생이겠다, 너무 속이 상하기도 해서 대놓고 울었다. 시험에 떨어질까 겁이 났다. 원서 내는 날 놀 수 있는 특권을 빼앗긴 것도 분했다. 시험은 내가 치는데 왜 내 마음대로 지원할 수 없는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내가 계속 ‘재수하게 되면 책임질 거냐’고 엄마한테 따지면서 울고 있으니까, 원서를 쓰던 담임이 한마디 했다. “너무 울지 마라. 올해 떨어지면 내년에 나랑 (원서 쓸 때) 또 보면 되잖아.” 했다. 나는 순간 욱해서 나는 “그게 더 싫다고요.” 하고 쏘아붙였다. 참고로 그때 우리 담임은 우리들에게 인기가 없기도 없었다. 그래도 평소 선생님 앞에서는 꼼짝 못 하던 순둥이 모범생이던 나였다. 그때 내 행동이 별 탈 없이 넘어간 건, 원서 접수가 꼬인 내 사정에다가, 또 엄마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마 그 순간 엄마와 담임은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했을 거다. 나중에 제정신이 돌아오고 나서 나도 그랬으니까.      


 시험 전날은 미리 신청해 둔 대학교 기숙사에서 잤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자려고 하면 할수록 가슴이 두근거려 잘 수가 없었다. 밤새 뒤척였지만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그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해서 더 잠이 오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새벽 5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까무룩 잠시 잠이 들었다. 6시가 되니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결국 1시간도 채 못 자고 일어났다.      


  고사장에 들어가기 전 교문에서 엄마를 잠시 만났다. 교문은 수험생과 학부모, 응원을 하러 나온 학생들로 북새통이었다. 당시 입시 응원은 요란했다. 애타는 학부모들이 매서운 ‘입시 추위’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끝날 때까지 내내 대학교 교문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대학에 ‘찰싹’ 붙으라고 교문에 엿과 찹쌀떡을 붙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는 학부모들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고등학교 1, 2학년 동생들도 나와 모교 선배들의 시험을 응원했다. 북 치고, 꽹과리 치고 노래와 구호로 시끄러웠다. 나도 내심 그런 활기찬 응원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나는 낯선 서울에서 후배의 응원은커녕 아는 얼굴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엄마는 따뜻한 격려 대신 지난밤, 거의 못 잤다는 말에 ‘우짜노?’만 연발했다. 내가 고사장으로 들어가야 하는 순간에서야 가까스로 잘 치라고 한마디 했다. 나는 나를 위한 것은 없는, 다른 사람을 위한 응원만 가득한 교문을 떠나 고사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시험은 무사히 치렀다. 그런데 나 바로 앞에 앉은 학생이 시험 시작하자마자 토했다. 선생님들이 즉시 달려와 부축해서 데려갔다. 그러고서도 그 애는 어떻게 시험은 봤는지 면접 보는 날, 나왔다. 이제는 괜찮아진 듯 그날 소란을 피워 죄송했다며 면접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과자를 돌렸다. 우리는 번호가 붙어 같이 차례를 기다리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애는 서울의 유명한 ‘대0외고’ 출신이었다. 그런데 학교 이름보다 더 놀라운 건 그 애의 성적이었다. 내신이 무려 5등급이었다! 당시 내신은 9등급까지 분류했는데, 자랑은 아니지만 내 내신은 1등급이었다. 부산의 작은 신생 학교인 우리 학교에서는 내신 2등급만 되어도 절대로 서울로 원서를 써 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서울로 오려면 무조건 내신 1등급이어야만 했다. 그만큼 서울의 대학은 우리에게 하늘과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 애는 내신 5등급이었던 거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우리 학교가 그만큼 수준이 낮다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대0외고의 수준이 그만큼 높다는 걸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서 부산과 서울의 수준 차이를 제대로 느꼈던 것만은 확실했다.    

  

  아이러니한 건 나는 합격했고 그 애는 떨어졌다는 거다. 그 이후로 우리 과에서 볼 수 없었으니 아마도 떨어졌을 걸로 생각된다. 아무리 수준 차이가 난다 해도 서울의 5등급과 지방의 1등급이 동급인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애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사실 모른다. 어쩌면 내신의 문제가 아니라 토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시험을 망친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벌써 30년도 전의 이야기다. 그때는 대학 입시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인 줄 알았다. 그때는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줄 알았다. 그때는 우리가 어른이 되어 애를 낳아 기르면 이런 풍경이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했던 치맛바람도 우리의 어머니들이 못 배운 탓이라고 배웠다. 그러니까 우리가 대학에 가서 ‘배운 엄마들’이 되면 사정이 나아질 거라고, 그렇게 들었고 믿었다. 하지만 그 후로 몇 년이 지나도, 내가 엄마가 되어도, 내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도, 또 이제 내 아들보다 더 어린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가 되어도 상황은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아니, 솔직히 나아지기는커녕 매년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인구, 특히 젊은 층 인구가 줄어든다는데 왜 이런 입시 스트레스는 줄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알바를 끝내고 집으로 가기 위해 탄 버스는 고사장을 여럿 스쳐 지나갔다. 도로가 막혔다. 그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홍보했어도 여전히 많은 차량이 학생들을 태우고 고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학교 앞 도로에는 유턴하려는 차량 줄이 길었다. 덕분에 정체가 길어졌다. 나는 살짝 짜증이 났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학교 앞에 모여 있는 학부모들, 교문으로 들어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조금 짠했다. 아무리 입시가 바뀌고 세월이 지나도 생애 첫 가장 큰 시험을 대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스트레스는 변함이 없다. 잠시 나의 짜증스러움을 잊었다. 어서 오후가 왔으면 했다. 그래서 그들이 힘들었던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는 후련함을 잠시나마 맛볼 수 있기를 빌었다. 이미 수능은 지났지만 그래도 언제나 고단한 수험생과 학부모들,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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