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얘들아 학교 가야지.
필리핀은 학교마다 학기 시작일이 다릅니다.
주로 8월이 1학기의 시작이고, 1월이 2학기 시작이지만
정확한 날짜는 학교마다 모두 제각각입니다.(필리핀 영어 선생님 曰)
3월 2일에 전국 모든 학교가 새 학기를 시작하는 한국과 달라 신기했습니다.
3월 초에 필리핀에 도착한 저희는 구체적인 입학수속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2학년을 마친 첫째, 그리고 5살 둘째의 학교를(실제로는 유치원 같은 시설이지만
정식명칭이 학교라서 학교라고 하겠습니다.)알아봐야 했습니다.
[여기부터는 혹시나 필요하신 분들을 위한 시시콜콜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이니 스킵하셔도 무관합니다]
필리핀은 1월이 2학기의 시작이었기에
3월에 전학 온 저희 딸들은 2학기 중간에 학교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미 또래 그룹이 형성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첫째의 경우 아내가 미리 학교에 입학신청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한국서 공증받은 재학증명서, 학생기록부 등을 첨부해서 신청했습니다.)
학교에서 이메일이 와 있습니다. 깜짝 놀랍니다. 영어기 때문입니다.
영어 이메일은 스팸메일이나 받아봤지, 진짜 외국인한테 받은 건 처음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구글 번역이 있습니다.
구글 번역기에 통째로 드래그해서 붙여 넣습니다.
수능 언어영역 마냥 분명 한글인데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역시 국산 파파고가 최곱니다.
때때로 너무 능글맞아 엉뚱한 번역을 하기도 하지만 양놈들이 한국인인 체 만든 번역기보다는 낫습니다.
(장기적으로는 구글번역이 낫습니다.)
이메일의 내용인 즉
1. 웰컴.
2. 필요한 서류가 있으니까 준비해 와.
3. 니 딸 영어 인터뷰 해야 해. 날짜 잡자.
4. 학비 얼만지 알지? 소 팔든 집 팔든 마련해 와.
번역기의 도움으로 메일을 해석한 저는 서류를 준비했습니다.
(필요서류)
1. Medical clearance form
이건 웬만한 병원 소아과에 아이 데리고 가면 됩니다.
한 마디로 아이 신체검사하고(키, 몸무게) 특별한 몸의 이상여부 있는지 확인서 발급받는 것입니다.
당연히 정밀검사는 아니고 대충 받는 검사입니다.
접수대에 갔더니 접수하려면 번호표를 뽑아야 한다고 합니다.
30분을 기다려서 제 차례가 옵니다.
접수대에 가서 준비했던 영어를 발사합니다.
"헬로, 마이 차일드 니즈(3인칭 단수 현재) 메디컬 클리어런스 폼 포 더 스쿨!"
알아듣지 못하지만 반복해서 들려주면 접수원의 귀가 뚫립니다.(제가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접수가 됐으니 소아과 선생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1시간을 기다립니다.
줄도 길고 애들도 더럽게 많고 환자 1명당 정해진 진료시간도 없습니다. 한국과 많이 다릅니다.
30분을 더 기다립니다. (총 2시간 경과)
화가 나지만, 영어로 화를 낼 생각을 하면 화가 가라앉습니다.
아이 이름이 호명되고, 검사가 5분 만에 끝납니다.
서류를 작성하며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묻습니다.
눈치껏 "니 아이 이상 있는데 없지?"라는 것을 캐치하고
"쉬즈 굳, 쉬즈 오케이. 노 디지즈(질병 없단 뜻. 디지지 않았다는 뜻 아님)"라고 답합니다.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이 멋지게 서명을 합니다.
오랜 기다림이 허무합니다. 화도 납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그곳은 소아과 선생님이 일주일에 4번만 출근하는 곳이었는데
때마침 선생님이 계시는 날이라 무사히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다른 일로 접수대기만 1시간 했다가 선생님 출근 안 하는 날이라는 대답들은 적도 있습니다.)
2. 기타 동의 서류들
이건 필수 동의서라 대충 읽고 그냥 서명했습니다.
(영어 인터뷰)
인터뷰 약속을 이메일로 잡고 학교에 갔습니다.
입구로 들어서니 경비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총기가 허용된 국가라 그런지 사뭇 철저합니다.
왜 왔냐고 묻길래 딸내미를 가리키며 "뉴 스튜던트!!" 라며 따끔하게 혼내줍니다.
그랬더니 가드가 빵긋 웃습니다. 저도 따라 웃습니다. 뭔가 통한 느낌입니다.
통했으니까 바로 통과시켜 주는 줄 알았더니 그건 그거고 서류를 작성하라고 합니다.
신분증은 필수입니다.
방문출입증을 받아 약속된 사무실로 갑니다.
파란 눈의 입학 담당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서울 줄 알았는데 아주 친절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걱정이었습니다.
영어를 거의 못하는 딸이 학교에서 괜찮겠냐고 제 손 안의 통역사인 파파고를 통해 물었더니
그런 친구들 많다고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위해 별도의 영어보충 프로그램도 있고,
교실에도 도와주는 한국 친구가 있다고 하여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첫째 딸의 입학수속을 마쳤습니다.
둘째는 유치원이라 그런지 입학절차가 비슷한 듯 더 쉬웠습니다.
(다만, 한국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과 달리 대부분이 낮 12시면 수업이 끝납니다.)
몇 군데를 알아보다가 조금 비싸지만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학교를 선택해 입학수속을 마쳤습니다.
다행히도 저희 두 딸 모두 성공적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마트에서 장을 봤습니다.
낯선 제품들, 낯선 냄새에 현기증이 났습니다.
그저 시원한 콜라 하나 사고 싶은데도 한참을 헤맵니다.
직원들에게 묻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같은 영어를 쓰는데 그들은 제 말을 못 알아듣고, 저도 그들의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이국 땅에서 물건 하나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완전히 새로운 환경, 다국적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서 제 두 딸은 얼마나 두렵고 힘들까 싶습니다.
등하교 길. 생각이 많아집니다.
수많은 외국인 엄마 아빠 아이들 사이를 딸들과 걸으며 걱정스러운 마음에 첫째 딸에게 말을 건넵니다.
"학교 가는 거 괜찮아?", "힘들면 언제든지 얘기해."
첫째는 괜찮다 합니다.
학교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집에 가는 척 멀리서 지켜봅니다.
또래 무리에 끼지 못하고 홀로 맴도는 것이 보입니다. 마음이 안 좋습니다.
하굣길. 걱정스러운 마음에 또 묻습니다. "오늘은 어땠어? 재미있었어?"
하지만, 첫째는 언제나 "괜찮다.", "재미있었다." 합니다.
진정 괜찮은 것인지, 그저 견뎌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걱정할까 봐 속 깊은 대답을 하는지.
아빠는 그저 미안하고 대견합니다.
둘째 딸을 교실에 데려다줍니다.
둘째는 선생님과 인사 후 쭈뼛쭈뼛 교실로 들어갑니다.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 주눅 든 눈빛이 꽤 가슴 아픕니다.
밝은 목소리와 미소로 작별을 하고, 억지로 안심시켜 그곳을 떠납니다.
몇 걸음 못 가 돌이켜 창문으로 빼꼼히 봅니다.
친구들과 선생님 사이에서 눈치껏 따라 하고 있습니다.
안 울고 잘하고 있습니다.
홀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즐거울 리 없습니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둘째가 힘들었을 학교에서 고물고물 그린 그림을 그려 가져옵니다.
분명 이 그림을 그리기까지 손짓발짓 우여곡절이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멋지고 대견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필리핀에 온 지 1년 반이 지난 지금. 그 사이 우여곡절들이 좀 있었지만 이제는 큰 걱정 없습니다.
둘 다 잘 버텨주고, 적응해 주고, 건강하게 있어준 것만으로도 너무 대견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마워, 우리 멋진 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