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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Aug 12. 2021

어떤 뭉툭한 깨달음이 쌓일 때

쓰레기 체력과 데드라인 효과의콜라보레이션이남긴 것

 나이를 많이 먹어보지 않아도 일정 레벨에 도달하면 저절로 알게 되는 이치가 몇 가지 있다. 채소가 이렇게 맛있다니. 새로 친구를 만드는 일은 어려워. 그중 가장 절절하게 깨닫게 되는 사실은 아마도,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옛날 옛적 문방구 앞 오락기로 스트리트 파이터를 하면 조작이 미숙해 계속 처맞기만 했던 나의 캐릭터. 나 때문에 뚝뚝 떨어졌던 HP가 꼭 처맞지도 않은 오늘날 나의 체력 같다. 그럼 운동을 하세요!라고 물으신다면 예, 합니다. 살려고 시작한 운동이고 아직 절박하지 않은지 매번 까먹은 척해요. 아, 맞다, 운동해야지, 벌러덩. 어떤 깨달음은 너무 뭉툭해서 삶을 무디게 스쳐가기만 한다. 뭐, 잠깐 아플 수는 있겠지만. 


 체력이 말 그대로 쓰레기인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뭘까? 데드라인 효과다. 요즘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은 일이 있어 다니고 있는 학원에서는 매주 과제를 내준다. 마감의 힘을 맹신하는 나는 미래의 나를 지나치게 믿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 때문에 매주 큰 코를 너무 많이 다쳐서 지금은 거의 볼드모트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 자의 이름을 불러선 안 돼!) 


 쓰레기 체력과 데드라인 효과의 콜라보레이션. 새벽 세시 반에 잠이 들어 아홉 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직 넘기지 못한 과제를 아침에 겨우 끝내고 나서 벌러덩 드러누웠는데, 세상에 누가 내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집요하게 찌르는 듯한 두통이 와서 너무 괴로운 거다. 또 왜 그런지 내 숨소리가 신경 쓰이고 공기가 내 몸 어디로 들어가는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 폐가 여기에 있었구나 싶고. 그 와중에 망할 송곳은 딱따구리에 빙의라도 된 듯 계속 쪼아대고. 밤을 새운 후유증이 이렇게나 무섭구나. 어렸을 땐 이틀을 밤 새도 이러지 않았는데..라고 한탄하면 안 된다. 이미 살려고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밤을 새우면 - 사실 명백하게 '밤을 새웠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 다음 날은 골골대며 허무하게 날려버릴 거라 예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다만 내 MBTI는 P로 끝나고 난 그렇게 MBTI를 믿진 않지만 뭐 그렇다고. 두통약과 잠으로 겨우 잠재운 그날의 고통은 다시 한번 경고장을 보냈다. 그렇게 살지 마, 제발!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뚜렷한 감각이 더 뚜렷한 신체적 고통으로 돌아올 때 그제야, 익숙하게 다짐한다. 다시는 어제처럼 살지 않기로. 진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듯 내일의 나 괜찮겠어? 그런데 그 태양은 어차피 똑같은 태양이고 나도 똑같은 나인데. 그냥 이대로 계속 볼드모트처럼 코 없이 사는 거 아냐? (그 자의 이름을 불러선 안 돼!)


까꿍


 누군가는 사람은 절대 고쳐 쓰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한다. 둘 다 사실일 수 있다. 누군가는 고쳐질 것이고 누군가는 변할 것이다. 음, 나는 그래도 후자를 더 믿고 싶다. 내가 계획적인 J 인간이 되길 열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모든 면에서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믿는 게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절대 고쳐 쓰지 못한다는 말은 진실이라 할지라도 무척 매정해서 싫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기회마저도 차갑게 뺏어가는 기분이 든다. 내가, 또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방면으로 변할 수 있길 바란다. (아, MBTI 맹신자 분들, P가 나쁘다는 게 아니니 오해 마시길. 전 제가 INFP인 게 무척이나 좋아요.) 


 전기충격기에 맞은 듯한 큰 깨달음이어야만 사람을 휙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뭉툭한 깨달음도 무디게 계속 삶을 스쳐 지나가다 보면 나름의 흔적을 남길 테다. 그 흔적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때 사람은 더 좋은 쪽으로 변한다고 믿고 싶다. 참, 사람은 - 양심적으로 '나는'이라 고쳐 써야겠지 - 어느 면으로는 참 멍청해서 이렇게 고생이 쌓여야만 마음을 고쳐 먹는다니. 고생이 쌓였을 땐 너무 늦는다고? 늦었다 생각했을 때 정말 늦었으니 빨리 시작하라는 명언도 있다! 


 밤샘과 데드라인 효과도 보장은 못 해준 망측한 결과물이, 보상으로 받은 뚝 떨어진 HP가 내 삶을 이번에도 뭉툭하게 스쳐 지나간다. 오, 이번엔 조금 뾰족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그래, 내일은 운동도 하고 일정표도 만들어야지. 미리미리라는 말을 그냥 이마에 새길까? 내일의 나는 그렇게 살 수 있길. 그렇게 잘 살고 있다고 대기업 합격 수기 쓰듯 글을 줄줄 써내는 날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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