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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Sep 17. 2020

돌고 돌아 덕질

'탈덕'을 꼭 해야만 할 것 같은 당신에게

    우연히 초등학생 때 쓴 일기장을 읽게 되었다. 왜 무럭무럭 자라나는 어린이의 사생활은 지켜주지 않고 어른인 담임 선생님이 그걸 매일매일 검사해야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어린 나의 모습을 읽고 있으니 꽤 재밌어 더 꼬박꼬박 사생활을 검사 맡았을 걸 싶다. 한참을 읽다가 2002년 여름에 쓴 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아팠다. 그래도 TV가 재밌어서 12시까지 봤다. 나는 음악 채널과 만화 채널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 세상에. 당시 5학년이던 꼬꼬마는 자기도 모르게 미래를 예지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출처: 나


    중고등학교 시절 나에겐 아이돌이 전부였다. 당시 낯을 많이 가렸던 내가 친구들과 빨리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은 동방신기 이야기였다. 매일매일 친구들과 동방신기 오빠들의 무대를 같이 보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어린 나이에 겁도 없이 오빠들을 보겠다며 지하철 새벽 첫 차를 타고 공연장에 가기도 했다. (열심히 하지도 않았지만) 공부에 지쳐 잠깐 듣는 오빠들의 3분짜리 노래에서 3시간만큼의 행복을 얻었다. 만화도 꽤 좋아했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처럼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해서 코스프레 동아리에 가입했다. 어떻게 옷을 만들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아 금방 탈퇴하긴 했지만. '화장실은 어디에 있나요'는 몰라도 '너는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함께 이긴다!'는 말할 수 있는 일본어 실력은 갖게 되었다. 내 학창 시절의 곳곳엔 덕질이 있었다.


    막 대학에 입학하고 새내기가 되었을 땐 아이돌은 졸업했다고 생각했다. 아이돌의 음악을 듣고 무대 영상을 보면 늘 아빠는 '기생오라비 같은 걔네가 밥 먹여주냐'는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친구들과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각자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선생님은 늘 '그거 다 한 때다'라며 한심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아, 팬질은 나같이 어린 사람들만 하는 거구나.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안 하게 되는 거구나. 어른이 하면 한심한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음, 그래서 그렇게 탈덕했냐고? 아니. 20대가 되고 나니 아이돌, 만화를 넘어 프로야구, 영국 드라마, 히어로 영화, 락 밴드 등등 분야, 언어,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드는 레벨에 도달했다.


 

그런 것이었어요! 출처: <우리 결혼했어요 시즌 4> 287회 (후출처: 트위터 일코누나*)


    어른들은 왜 그렇게 덕질이 한심한 듯 말했을까? 대학 가면 다 예뻐져서 연애하는 것이 당연한 거니까? 근사한 남자친구가 있는 예쁜 여대생은 덕질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혹은 근사한 남자친구가 있는 예쁜 여대생은 덕질 같은 건 안 하니까? 예뻐 보이고 싶어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높은 하이힐을 발이 아파도 신고 대학교 언덕을 올랐지만 여전히 나는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예쁜 대학생은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면 미팅은 꼭 해야 한다는 말에 술게임이 죽도록 싫어도 몇 번 나가기도 했지만 그렇게 근사한 애인을 만나기는커녕 얻은 건 술에 취해 크게 넘어져 얼굴에 남은 상처뿐이었다. 내 주변 어른들은 계속 왜 남자친구를 만나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꼭 게임 속 세상처럼 일정 레벨에 도달하면 깨야하는 퀘스트같이. 주변 사람들을 넘어 SNS 속 모르는 사람들이 '젊을 땐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라'라고 훈수를 두는 글을 올리면 '꼭 그래야 해?'라고 (속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그런 결론에 닿은 게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남들처럼 사는 것이 정답일 것이라고 자신을 나무랐다. 내 주변 친구들은 이미 다 '정말 어른'처럼 연애를 하고 '이상적인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기에.


    어떻게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똑같은 궤적을 그릴 수 있을까? 머리가 자라나서야 인생엔 모두가 깨야 하는 퀘스트는 없다고, 각자의 인생엔 각자의 방식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 시간이 없으니 대학생 때 유럽 여행은 꼭 다녀와야 하는 거래요'라는 말에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모은 돈을 아이돌 콘서트에 쓰고 싶다면, 아이돌 콘서트에 쓰는 것이 당연 행복한 선택이다. '젊었을 때 사랑도 하고 실연도 해보는 거야'라는 말에 연애는 해야 할 것 같지만 역시 TV 속이나 2차원 세상의 사람에게 더 사랑을 느낀다면, 굳이 누군가를 억지로 만날 필요는 없다. 조언으로 가장한 참견에 신경 쓰기 시작하는 순간, 내 삶은 더 이상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게 된다. '개썅 마이웨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나만의 리듬으로 살아내기. 어렵다. 하지만 그 방식이 내 인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십니다. 출처: 티스토리 HUIHUI**


    '10년 뒤 저는 어떤 사람인가요?'라 물어보면 '여전히 덕후란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새내기 때의 나라면 우울했을 것 같다. 지금은 아니다. 덕질할 놈이 결국 돌고 돌아 덕질하는 게 뭐 어때서. 요즘은 나이 사십, 오십 먹어도 딸내미 손 잡고 덕질하는 사람도 많은데. 공연장을 쏘다니는 백발의 할머니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매우 귀엽고 행복해 보인다. 그럼 됐지, 뭐.



출처:

https://twitter.com/ILCONUNA/status/640361635832422401

** https://lunarplaque.tistory.com/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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