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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Sep 17. 2020

스물아홉, 마이 퓨쳐

오늘의 선곡표: 빌리 아일리시 <My Future>

    '난 나의 미래와 사랑에 빠졌어, 그를 만나는 날이 기다려져.' 아무 생각 없이 에어팟을 꼽고 노래를 듣던 중 앞뒤 맥락 없이 그냥 귀로 들어온 단 두 문장. 빌리 아일리시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래, 18세의 나이에 신인상을 포함해 이미 그래미 4관왕을 이뤘으니, 당연 그의 앞길엔 레드카펫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거다. 부럽다. 어린 나이에 남부럽지 않은 커리어를 쌓고, 다가올 미래와 사랑에 빠졌다고 노래할 수 있어서. 심지어 이 시국에!


    열여덟의 내가 그렸던 미래를 떠올려보면 분명 지금의 모습은 아니다. 꼭대기 층까지 외벽이 유리로 만들어진 번쩍번쩍한 건물. 흔히 그리는 커리어우먼의 모습으로 한 손에는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그 빌딩으로 바쁘게 출근을 하는 모습. 그게 11년 전 내가 그린 지금이었다. 뭐가 되고 싶은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그려낸 내 모습에는 어떤 일을 하는지 보다는 온통 뭘 입었고, 외모는 어떤지에 대한 환상만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던 건 오히려 내가 아닌 미래의 남편 모습이었다. 잘생긴 내 남편, 얼굴은 누구를 닮고 무슨 일을 하고... 여기까지 하자.


    그래서 지금은 어떻냐고? 운 좋게 붙은 작은 회사에서 2년을 어찌어찌 다니다가 드디어 때려치우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 회사는 유리 빌딩이 아니었다. 커리어우먼 코스프레는 진작에 포기하고 두꺼운 안경과 민낯 그리고 청바지 차림으로 출근을 하곤 했다.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고 정신 차리려고 먹는 커피를 손에 든 채. 일 또한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아서 하지도 않았다. '잘하느냐'를 따지면 냉정하게 '아니오' 쪽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저 남들처럼 마지못해 다녔다. 남편? 남자친구? 11년 전의 내가 듣는다면 까무러치겠지만 그런 거 없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일과 사랑, 사랑과 일 둘 다 완벽하게 놓친, 열여덟의 눈에는 처참히 실패한 미래다.


직장을 마지못해 다니면 이렇게 된다. 이거 내가 상상한 미래 아니야 아니야. (출처: 인스티즈 '공감 쩌는 직장인 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는 존재 자체가 적폐인 문장이 있다. 24일까지는 불티나게 팔리고 25일에는 그럭저럭 팔리다가 26일이 되는 순간 팔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놈이.. 만들었을까?) 어렸을 땐 저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스무 살 때 동네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실제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팔았고, 당시 같이 알바를 하던 친구와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래!'라며 키득댔으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자신만의 재능은 있다는 말은 어렸을 때부터 지겹도록 듣지만 정작 그 누구도 그 재능을 언제 발견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스스로를 크리스마스 케이크라 생각했던 나는 스물여섯이 되어서도 무엇을 잘하는지 몰랐다. 그럼 난 이제 안 팔리는 건가? 이십 대 나이에 시옷이 들어가면 중반이라는데, 나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지? 누구나 자신만의 재능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그럼 왜 나는 진작에 아이유가 아닌 건데. (띄어쓰기없이보낼게질투인거같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기에 슬슬 포기하기 시작한 때가.


    서른이 코앞이지만 내 인생은 멀쩡하고 여전히 나는 어리다. 케이크야 맛은 조금 달라졌을 수 있지만 폐기 처리해야 할 만큼은 아니다. 먹어도 배탈은 안 날 걸? (당연하게도 나이는 얼마만큼 먹든 배탈이 전혀 날 리가 없는데.) 어떻게 버티며 살다 보니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도 찾았다. 드디어 만나기를 기대하는 '마이 퓨쳐'가 생겼다. 흠, 열여덟이 아니고 스물아홉이 그의 미래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과거의 나라면 '인생 망했다'며 좌절했을 나이에? 주변 사람들과 사회가 다 같이 입을 모아 '안정적인 직장에 자리 잡고 적당히 괜찮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 화목한 가정을 꾸리라'라고 압박하기 시작하는 나이에? 답은, 빠질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잘하는 일을 찾고 꿈을 꾸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 하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기엔 '그래도 나이를 생각해야지'라는 벽이 너무 크다. 남들과 똑같은 길을 걷다 살짝 샛길로 빠지려고 하면 어떤 큰 인형 뽑기 집게가 나를 들어 올려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같다. 그렇게 좌절된 누군가의 꿈과 미래는 또 얼마나 많을까.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 할머니와 할머니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김유라 PD가 함께 쓴 책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수 없다>를 펼쳐보면 이렇게 쓰여있다. "서른 언저리에 서니 어떤 예감이 몰려온다. 더 이상 내 인생에 반전 같은 건 없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 대개 '기회'란 20대에게나 주어지는 카드 같아서." "염병하네. 70대까지 버텨보길 잘했다."** 이젠 안다. 우리 곁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인형 뽑기 집게가 아무리 들어 올리려 애써도 열심히 샛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도전, 기회, 꿈같은 단어는 20대를 넘긴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믿음은 백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너무 해롭다. 70대에 꿈을 이뤄도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만큼의 시간이 남는다. 역시, 잘하는 일을 찾고 꿈을 꾸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 


두 분 다 고맙습니다. 사진 출처: 나


    그래서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냐고? 열심히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잔뜩 묻은 글을 쓰는 사람. 그렇게 쓰다 보면 언젠가는 책도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름 앞에 '작가'라는 타이틀을 걸어보고 싶다. 결혼을 딱히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지만 혹시 내 최애가 거짓말처럼 '난.. 너 없이 못 살아'라며 고백한다면 생각 좀 해볼 것 같다. (대충 안 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나, 스물아홉이 사랑에 빠진 미래다.


    '명문대를 자퇴하고 음악을 위해 이 오디션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만큼의 비장함 까지는 아니지만, 모두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삶을 정착하고 있는 시기에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건 사실 두려운 일이다. 게다가 판데믹으로 얼어붙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더더욱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 여전히 마이 퓨쳐는 불안하다. 하지만 이제는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나를. 그러다 '앗, 척추 수술 1700만 원!' 하며 중간중간 스트레칭하는 나를.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난 나의 미래와 사랑에 빠졌어, 그를 만나는 날이 기다려져. I'm in love with my future, can't wait to meet her.


덧,

빌리 아일리시의 'My Future'는 사실 자신의 빛나는 커리어가 기다릴 미래를 사랑한다는 노래는 아니다. (인정한다. 그 가사는 내 열등감을 건드렸다.) 아일리시는 팬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이 곡을 쓰게 된 계기를 밝혔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라고 늘 나에게 말해준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또 이 세상 그 자체를 위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것을 안다. 달라지는 것은 우리 하기에 달렸다. 꼭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희망을 잃지 말자."*** 세상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절망이 잠식한 나날이다. 그럼에도 사랑에 빠질 미래에 대한 기대는 '우리가 직접 나서서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선곡표:

https://youtu.be/1FvEDuWeB4A


출처:

* https://www.instiz.net/pt/5902438

** 박막례, 김유라 지음.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수 없다> 위즈덤하우스, 2019. p.5

*** Miller, M. (2020, Jul 31.) Billie Eilish's New Song 'my future' Finds Hope in Quarantine. Esquire.

헤더: Billie Eilish shares brand new single “my future” on Finneas’ birthday. some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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