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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Oct 31. 2020

아이 캔 두 잇, 유 캔 두 잇, 위 캔 두 잇!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옛날 사진이 가득한 가족 앨범을 보며 궁금한 게 많았다. 그중 한 사진 속에는 지금 내 나이 정도로 보이는 엄마와 엄마의 직장 동료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각자의 방식으로 풍성한 파마머리와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그들을 보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해 이것저것 막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 이게 몇 년 때야? 이 분은 누구야? 엄마는 무슨 일을 했어? 등등.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엄마의 그 사진이 떠올랐다. 우와, 엄마랑 엄마 친구처럼 생긴 사람들이다. 꼭 엄마한테 같이 보러 가자고 말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봤다. 나 혼자서. (힝입니다, 어머니)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토익 600점을 넘기면 대리로 진급시켜주겠다'는 말에 사내 영어 토익반으로 모인 삼진그룹 입사 8년 차 말단 직원 자영, 유나, 보람. 어느 날 자영은 외근 중 자사의 공장에서 폐수가 '콸콸콸' 흘러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잘 해결되는 듯했으나 어딘가 찝찝한 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세 친구는 힘을 합친다. 


    헐리웃의 영화에선 힘이 센 히어로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세상을 구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일단 그런 히어로가 존재하지도 않는 걸. 대신 작고, 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부조리를 차마 지나칠 수 없는 양심'이 이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공장에서 폐수가 쏟아지는 장면을 목격한 자영. 그는 그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 척하지 않고 동료와 함께 회사가 숨기고 있는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고 멋진 영웅이 되고 싶어서? 내부 고발하면 잘리는데 무슨. 아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에 대답한 것뿐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비리를 파헤치는 세 친구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니까. 그들은 좌절한다. 펑펑 울기도 한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뿐이다. 돌아보면 이 세상은 아이언맨 같은 히어로의 능력보단 이자영과 정유나 그리고 심보람 같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변해왔다.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는 얼마나 멋진가. <보건교사 안은영> 속 욕은 하면서도 젤리를 처단하는 안은영이나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평범한 사람은 아니려나?), <엑시트> 속 남들에게 구조를 양보하고 결국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용남이와 의주. "그래도 포기 안 해!"라며 우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자영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늘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너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힘에 조금은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옳은 일은 원래 행동으로 옮기기 무척이나 어려우니까 머뭇거려도, 두려워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특히나 그 이야기가 여성들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의 배경은 1995년이다. 요즘 유독 90년대를 추억하며 '그 시대가 좋았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정말 90년대가 늘 좋기만 했을까? 영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유능하지만 고졸이라는 이유로 진급하지 못하고 유니폼을 입은 채 보조 업무만 하는 말단 직원들. '애써 가르쳤더니 임신을 하냐'며 퇴사 압박을 받는 여자 직원. 성차별뿐만 아니라 환경보호에 대한 무지함, 상사의 갑질, 게다가 사내 흡연까지. (이건 정말 비흡연자로서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 딩동댕 유치원에 환장했던 꼬꼬마가 다 커서 보니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들이 무분별하게 일어나는 시대였구나 싶다. 영화에선 말한다. "마냥 옛날이 좋았다 하는데 그건 옛날을 안 살아본 사람들이 너무 무책임하게 하는 말 아닐까?" 아직도 이 세상엔 부조리한 일이 가득이다. 그럼에도 옛 시대를 돌아보며 '어떻게 저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라며 놀라고 의아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시대를 관통한 사람들의 선의에 조금씩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가 되도록 여전히 차별은 만연하고 뜯어고쳐야 할 점은 많다. 원래 세상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찔끔찔끔 변하니까. 영화 속 세 주인공처럼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다시 25년 후, 2020년을 모르는 사람이 '그때가 좋았다'라 말할 수 있도록.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 드는 생각이 있다. 97년이 다가왔을 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직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IMF로 가장 먼저 정리해고되진 않았을까.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화를 신나게 보고 나와서 괜히 착잡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왠지 비관적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옳지 않은 일에 당당하게 '유 아 롱!'이라 외쳐본 그들이니까. 당당하게 "아이 캔 두 잇, 유 캔 두 잇, 위 캔 두 잇!"을 외치고 진짜 '캔 두 잇' 해버린 그들이니까. 어딘가에서 멋지게 살아가고 있을 거야. (물론 자영이와 유나와 보람이가 사는 한국엔 IMF 같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믿어요.) 


    주인공 캐릭터들을 포함한 개성이 통통 튀는 인물들. 그 시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배경과 의상. 무거운 주제를 즐겁게 볼 수 있는 유쾌함까지. 후반부에서 K-영화 특유의 감동 자극 연출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누구에게나 무난하게 추천할 수 있는, 최소 "누구 때문에 봤는데 재미없더라" 소리는 듣지 않을 영화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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