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tue of Pablo(Pau) Casals
2023년 1월 22일
스페인 바르셀로나(Barcelona) 북서쪽에 있는 몬세라트(Montserrat) 산 중턱에 20세기 가장 뛰어난 첼리스트 중의 한 사람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Pau Casals i Defilló)의 동상이 있다. 동상의 받침에는 'Pau Casals, 그의 탄생 100주년, 1876-1976)'이라고 써 있는데, 1976년 스페인의 조각가 후안 리불(Joan Rebull)이 조각한 것이다. 동상은 카탈루냐(Catalonia) 정체성과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몬세라트 수도원(Santa María de Montserrat Abbey)의 건축가들이 만든 '십자가의 길(Via Crucis, Way of the Cross)'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카탈루냐에서 나고 자라 이곳 수도원에서도 많은 연주와 공연을 했던 카잘스가 카탈루냐 독립과 문화 자치의 지지자로서 기여한 것을 기리고자 한 것이다. 실물 크기의 예술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여정을 보여주는 십자가의 길은 수도원 설립자인 아보트 올리바(Abbot Oliba)의 동상에서 시작되며, 성 미카엘의 십자가(St. Michael's Cross) 전망대에 이르면 수도원과 몬세라트 산, 그리고 멀리 피레네산맥(Los Pirineos)을 내다볼 수 있다.
몬세라트 산은 최고봉인 성 헤로니모(San Jerónimo, Sant Jeroni)가 해발 1,236미터이지만, 해저 융기로 생긴 수만 개의 바위로 이뤄져 있어 로마인들은 톱니 모양의 산(Mons Serratus, saw-toothed mountain)으로, 카탈루니야인들은 신성한 산(Montsagrat, sacred mountain)이라고 불렀다. 베네딕트회 몬세라트 수도원의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1011년 리폴 수도원(Santa Maria de Ripoll Abbey)의 한 수도사가 리폴 출신의 아보트 올리바에게 책임을 맡겼다고 전해진다.
880년에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목각의 검은 성모상은 카탈루냐 지방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1,000년을 기념하여 1881년 9월 11일에는 카탈루냐의 국경일에 맞춰 교황 레오 13세(Pope Leo XIII)가 몬세라트의 성모를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이라고 선포했다. 바르셀로나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는 몬세라트 바위산과 수도원의 조화에서 성 가족 성당(La Sagrada Familia) 건축의 영감을 받았다. 1987년부터 성 가족 성당 서쪽 면의 '수난의 문(Passion Façade)'을 맡아 음각 예수상을 만든 조각가 호세 마리아 수비라치(Josep Maria Subirachs)는 몬세라트 수도원에도 성 조르디(St. Jordi) 음각상을 조각했다. 수도원은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으로 꼽히는 에스콜라니아 합창단(Escolania de Montserrat)을 운영하고 있다.
1876년에 태어난 카잘스는 교회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4살 때부터 여러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13세 때 중고 악보상에서 우연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집을 발견한 후 연구와 연습을 거듭해 25세 때부터 독주회를 통해 발표했고, 혁신적인 첼로 운지법을 개발하며 1936-1939년 사이에는 전곡을 녹음했다. 17세부터 본격적인 솔리스트로 활동한 그는 1905년부터 1937년까지는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Denis Cortot), 프랑스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Jacques Thibaud)와 카잘스 트리오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1920년부터는 사재를 털어 '파우 카잘스 오케스트라'를 창립해 지휘자로서도 활약했는데, 1928년에는 '연주회 노동자 협회'를 만들어 월수입이 100달러도 안 되는 사람들만을 위한 회원제 정기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1936년 왕당파 파시스트인 프란시스 프랑코(Francisco Franco)가 반란을 일으키자 카잘스는 1938년 10월 19일 리세우 대극장(Gran Teatre del Liceo)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프랑코 독재정권에 반대해 망명하였다. 사선을 넘어 피렌체산맥을 건너온 50만 명이 넘는 난민들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영국과 프랑스에서 개최한 후 연주가 생활을 청산하고, 카탈루냐를 닮은 프랑스 남부의 소도시 프라드(Prades)에 은둔하며 교사 생활을 했다. 프랑코 정권은 라디오를 통해 "널 잡으면 다시는 첼로를 연주할 수 없게 팔꿈치 아래를 완전히 잘라버리겠다."라고 공언하기도 했지만, 카잘스는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하는 한 공개적인 연주를 거부한다고 공식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코의 반란을 지원했고 독재자가 통치하던 독일과 이탈리아 등에서의 연주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프랑코를 승인한 미국으로도 절대 이민하지 않겠다고 했던 카잘스는 1961년 11월 3일 자신이 존경한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 백악관에서 연주했고, 1971년 10월 24일에는 유엔에서 평화상을 수상하며 95세의 나이로 유엔총회 회의장에서 '새의 노래(Song of the Birds)'를 연주했다.
그는 숨가쁘고 격앙된 목소리로 "거의 40년 동안 대중 앞에서 연주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하겠다. 이 작품은 '새의 노래'라고 한다. 하늘의 새들은 "평화(peace), 평화(peace), 평화(peace)"라고 노래한다. 음악은 바흐와 베토벤 그리고 모든 위대한 사람들이 사랑하고 감탄했을 음악이다. 매우 아름다운 음악이자 내 나라, 그리고 카탈루냐의 영혼이다."라며 연주를 시작했다. 새의 노래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열 네 종류의 새들이 반기며 축하한다는 내용의 카탈루냐 민요이자 크리스마스 캐럴이라고 한다. 카잘스는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고, 망명 후 매일같이 새의 노래를 연주하면서 이 노래를 좋아했던 어머니의 고향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에서 숨을 거뒀다.
수도원 주차장 근처에는 조셉 마리아 수비라치의 조각품 '이해의 계단(Escala de l'Enteniment, Stairway to Understanding)'이 있다. 그는 마요르카 왕국의 철학자, 신비주의자, 선교사인 라몬 율(Ramon LLull)로부터 영감을 받아 서로 다른 존재와 삶의 계층 질서를 나타내기 위해 돌, 불꽃, 식물, 짐승, 사람, 하늘, 천사와 신 등 일곱 개의 서로 다른 존재와 삶의 계층적 질서를 나타내기 위해 직사각형 블록들을 나선형으로 쌓았다. 인간은 물질 세계와 지적 세계 모두에 관여하므로 우리의 선택에 따라 탐욕스럽거나 고결하게 될 수 있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는 95세가 되어도 6시간씩 매일 연습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도 조금씩 발전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 전쟁, 핵무기 확산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카잘스는 말했다. "어떤 형태의 예술이든 그 자체로는 대답이 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음악은 어떤 목표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 자체보다 더 큰 어떤 것, 즉 인간성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사실 현대음악에 대한 내 의견, 인간성이 결여됐다는 평가의 핵심에는 위와 같은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음악가도 인간이잖아요. 음악 자체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또 그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될 수 없고요."(카잘스, 2021: 76).
프랑코를 반대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프랑스에서 활동한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José Ramón Pinochet Ugarte)의 쿠데타를 반대하다 망명 하루 전 갑작스럽게 사망한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그리고 파블로 카잘스가 모두 1973년에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파블로 카잘스 글, 앨버트 칸 편, 김병화 역. (2021).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파주: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