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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응밍 Jan 04. 2023

[Opinion] 따끔따끔 피어나는 다정한 세상!

<나의 첫 심부름>과 <만달로리안>에 교집합이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글쓴이의 문자에 다소 영혼이 없어 보이나 당시 토익 학원 숙제에 영혼을 빼앗긴 상태이었음을 감안해 달라.


 스무 번이 넘는 생일을 맞이한 후, 나의 세계에 어린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나와 '어린이'라는 존재가 그다지 큰 접점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가 자의적으로 그려낸 경계선 안으로 가장 자주 침입했던 이가 있다면 띠동갑이 넘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무도한 5촌 조카-편의상 동생이라고 부르겠다-다.


 휴대폰을 산 이후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고, 가끔은 전화까지 해서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깜찍함을 지녔다. 최선을 다해 문자와 전화에 답을 해주고 싶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우리의 대화에는 도통 맥락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소재 전환과, 한 치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넘실거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그냥 웃겨서 'ㅋㅋㅋㅋ'를 보냈는데, 동생은 그걸 '비웃음'이라고 생각해서 사과를 요구한다거나. 그래서 한동안 동생에게 의성어 'ㅋ'을 쓰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


 나와 동생의 가장 큰 다름이라면 어른-어린이로 구별되는 무언가일 테다. 그래서인지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떠올림이 필요하다. 그건 나도 언젠가는 어린이였다는 떠올림이다. 그렇기에 동생과 대화를 하다 보면 늘 끝에는 이런 질문이 따라온다. "나도 저랬나?" 혼자 궁금해하다가 엄마 아빠에게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고, 본가에 유물처럼 모셔져 있는 어린 시절의 일기와 편지, 사진과 영상을 찾아보며 저 나이 때 나는 어땠는지 곰곰이 반추해보기도 한다.


 물론 백 퍼센트의 온전한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기는 어렵지만, 막연하게나마 어린 시절의 희로애락애오욕을 더듬어 보다 보면 (예를 들어, 아빠인 줄 알고 낯선 삼촌의 등짝에 달려들었다가 주변 어른들의 반응-웃음-에 그 실수를 깨달은 적이 있다. 밀려오는 수치스러움에 그 등짝의 주인이 사실 누구인지 알았던 척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한 척을 했다던가.. 이렇게 어린 시절의 강렬한 감정은 어른이 된 누구에게나 남아있으리라 생각한다.) 동생의 행동이나 감정, 생각들을 살풋 짐작-물론 지레짐작하는 것보다는 당신의 말을 직접 듣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하게 된다.


 나와 동생을 각각 구성하는 다층적이고도 어지러운 요소들 덕분에 두 사람이 가진 주파수의 대역폭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겹침이 발생하거나 혹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신기하게도 이 따끔따끔한 상호작용의 요인은, '가장 큰 다름'이라고 생각했던 '어른-어린이로 구별되는 무언가'다. 멀리서 보면 가장 큰 다름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이 다름은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가장 큰 다름'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더 큰 다정함이 피어오른다고 믿는 편인데, 2022년에는 나의 이 믿음에 부합하는 콘텐츠 두 편을 만났다. 일본 리얼리티 쇼 <나의 첫 심부름>과 디즈니 플러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스타워즈의 스핀오프인 <만달로리안>이다. 두 개의 프로그램에는 모두 '어린이'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물론 어린이가 등장하는 콘텐츠는 수도 없이 많지만, 유난히 내 시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건 <나의 첫 심부름>에서 보여지는 다정함과 그런 다정함을 피워내는 <만달로리안> 속 실천들이다.



다정한 세상은,



 일본 리얼리티 쇼 <나의 첫 심부름>은 난생처음 혼자서 심부름을 하러 가는 어린이의 모습을 담아낸다. 저마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어린이들을 보면, 왜 이 프로그램이 오랜 기간 동안 살아남았고 또 사랑받았는지 백분 이해하게 된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다 다른 수고와 애틋함으로 가득한데, 모든 에피소드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안전'이다. 자칫 위험해 보일 수도 있는 모험의 성공을 위해서는 '안전함'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물론 프로그램 제작진의 어떠한 개입과 준비라는 맥락에서 이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린이들의 모험을 지지하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안전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 모든 이들이 이를 느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린이가 주인공인 프로그램이지만, 여기에는 많은 어른들이 등장한다. 부모이기도, 친인척이기도, 아이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주변인이기도 한 이 어른들은 (앞서 말했듯 어린이들의 모험을 지지하는) 이 모험의 조력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이 중에서도 예상치 못한 프레임 밖의 존재-어쩌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우리들'과 가장 가까운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존재는 <나의 첫 심부름> 8화(넷플릭스 기준)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내보인다. 해당 화의 주인공은 '소타'다. 소타는 집이 위치한 언덕을 쭉 내려가서 생선 가게에서 회를 떠 달라고 하고, 오는 길에 동생 이유식에 쓸 사과랑 분유를 사 와야 한다. 소타의 심부름을 그 누구보다 고대한 소타의 아빠는 회를 뜰 생선을 직접 잡아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첫 심부름에 대한 압박감이 심했던 걸까. 소타의 심부름은 순탄치 않다. 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리막길에서 심부름 거리를 담은 바구니의 끈이 끊어진다. 생선과 얼음이 길바닥에 나뒹군다. 어찌어찌 미끈미끈한 생선을 주워 담았지만, 끊어진 끈을 다시 동여 메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게 혼자 고군분투하던 소타의 시선에 (스태프가 아닌) 풀 베는 아저씨가 맺힌다. 소타는 아저씨에게 총총 다가가 조심스럽게 도움을 요청한다. "저기요, 끈을 못 묶겠는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골칫덩어리이던 끈도 해결했겠다. (세상이 한층 아름다워 보였을까?) 소타는 생선 가게로 향하던 길에서 마주친 한송이의 민들레도 야무지게 챙긴다. 그렇게 모든 과정이 순탄해 보였을 때, 다시 한번 끈이 끊어진다. 소타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생선의 꼬리가 아닌 몸통을 잡아 들어 올리고, 끈은 포기하고 바구니 자체를 들어 올린다. (뒤에서 "성장한 거 아니에요?"라고 묻는 내레이터의 말이 시청자의 심금을 울린다.)


 생선 가게에서 회 떠오기 심부름을 성공한 소타는, 가뿐해진 몸으로 언덕을 더 내려가 과일 가게와 드럭스토어로 향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심부름 항목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울트라맨 주스 두 캔을 사기도 했고, 귤도 두 개나 더 사버렸고, 300그램이면 되는 분유도 1.6킬로나 사버리긴 했다. 짐이 예정보다 2.5킬로나 무거워진 것이다. 그래도 꼭 해야 했던 것들을 해냈으니 대견할 뿐이다. 이제 소타는 다시 언덕을 올라야 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자욱이 깔린 안개를 넘어 언덕 절반을 올라온 시점. 잠깐 짐을 내려놓고 앉아서 쉬는 그 찰나의 순간에 사과 두 개가 통통-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길 한가운데라 위험하기 때문에 스태프가 먼저 사과를 쫓아 가는데, 다행히도 사과 하나는 길 끝에, 다른 하나는 도로 옆 꽃밭에 안착한다. 안전하게 사과 두 개를 되찾은 소타는 다시 한번 언덕을 오른다.


 드디어 소타에게 심부름의 끝이 보인다. 심기일전하여 엄마와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도착하기 위해, 소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쉰다. 그러나 이 무슨 에리스-신화와 전설에 따르면 황금 사과를 하객들 사이로 던져버린 전적이 있다.-의 농간일까? 또다시 사과 두 개가 제자리를 벗어나 도로로 도주한다.



 그러나 사과가 내리막길을 따라 돌돌돌 굴러 떨어지는 돌발의 순간, 프로그램의 스태프가 아닌 '어떤' 아저씨(어른 A라고 부르겠다.)가 차에서 내려서 소타를 돕는다. 굴러 떨어진 사과를 잽싸게 주워 소타에게 건네준 어른 A는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자신의 차로 돌아간다. 덕분에 소타는 이제 큰 어려움 없이 집까지 향한다. 힘차게 엄마를 부르며, 마침내 심부름을 끝낸 소타는 엄마에게 "엄마 선물이에요"라며 울트라맨 주스 한 캔과 (플라스틱 빨대에 정성스레 꽂은) 민들레 한 송이를 건넨다. 애틋함과 감동 한 스푼이 첨가된 소타의 모험은 이렇게 끝이 난다.


 소타의 이야기를 비롯해 <나의 첫 심부름>의 모든 에피소드가 그렇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프로그램이 담아낸 세상이 안전하고 따뜻하기 때문일 거다. (프로그램 제작진의 의도에 따라) 철저하게 기획된 세상이라고 냉소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소타에게 사과를 건네준 어른 A처럼. 프로그램과 아무 접점도 없는 어떤 어른이, 아이와 일면식도 없는 어떤 어른이, 그러니까 완전히 프레임 밖의 존재였던 어떤 어른이 기꺼이 다정해지길 선택하는 것을 보고서도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그 자체가 우리 또한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하나의 증거인데 말이다.


 물론 프로그램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나의 첫 심부름>이 보여주는 건 완결된 다정한 세상-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이들은, 어쨌건 완성된 '다정한 어른', '따뜻한 어른' 등으로 등장한다.-이다. "모두가 지켜봐 줄 거예요. 그러니 더 힘낼 수 있어요. 마을이 아이를 키워내고 마을이 아이를 지켜 줍니다." (<나의 첫 심부름> 12화 中, 넷플릭스 기준)라는 내레이션이 이를 잘 드러낸다.


 나는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세상이 너무나 탐나고 부럽다.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저런 믿음을 가지고, 어린이에게 다정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좀 더 디테일한 질문을 던져보자. 프레임 밖에서 나타난 어른 A는 왜 (그에게 낯선 어린이인) 소타에게 사과를 건네주고 홀연히 사라졌을까? 단순히 만유인력에 끌려버린 걸까? 나는 이에 대한 답을 <만달로리안>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끔따끔 피어나지!



 (오타쿠의 욕망을 간신히 거세하고, 스타워즈 시리즈에 대한 사족 없이) <만달로리안>을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해 보자면, 만달로어인-스타워즈 세계관 속 유명한 전투집단-이자 피도 눈물도 없는 고독한 현상금 사냥꾼 딘 자린이 포획 대상이었던 아이 그로구에게 감겨 기꺼이 다정해지기를 선택하는 뽀짝무구한 육아물이자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명성이 높은 그는 어느 날 신원미상의 어떤 이(50세)를 생포(혹은 그 과정에서 사망한다면 증거를 가져오는) 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포획 대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딘 자린은 현상금 드로이드 IG-11와 조력하여 그 대상을 발견한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게 된 건 포대기에 싸인 조그마한 아이(그로구, 50세)다. 자신의 예상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포획 대상에 놀라기도 잠시, 현상금 드로이드 IG-11이 아이를 사살하려 한다.



 딘 자린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에게 총구를 겨눈 IG-11의 머리를 날린다. 어쨌거나 아이를 살려서 의뢰인에게 데려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의뢰인에게 돌아가는 과정 또한 녹록지 않다. 아이를 뒤쫓는 강도들을 상대하다가 다치기도 하고, 자와족-스타워즈 세계관 속 고물상 같은 존재-에게 자가용 우주선을 털린 후 부품들을 되찾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한다. 이때 그로구의 알 수 없는 능력(포스)으로 목숨을 건지고, 딘 자린과 그로구 사이에 미묘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딘 자린은 의뢰인에게 그로구를 데려가 엄청난 보상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조그마한 아이가 눈에 걸린다. 전쟁고아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자꾸 떠오른다. 그는 이례적으로 의뢰인과 현상금 사냥 길드장에게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묻지만, (이는 현상금 사냥 길드의 규칙에 위반된다.) 돌아오는 답은 없다. 모든 걸 잊고 다음 의뢰를 받아 떠나려 하지만 우주선에 옅게 남아있던 아이의 흔적을 발견하고서, 종국에는 아이를 구출한다. 그렇게 <만달로리안>의 이야기-육아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처음에 딘 자린은 그저 아이를 안전한 곳에서 지낼 수 있게만 돕고 떠나려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이를 뒤쫓는 잔당이 등장하고, 그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온 은하계를 누비게 된다. 아이의 동족, 혹은 적절한 양육자를 찾기 위한 과정에서 딘 자린은 점점 변한다. 그의 메말랐던 감정이 채워지며, 아이와 애착을 형성하게 된다. 절대로 믿지 않았던 드로이드의 도움을 받고, 자신이 속한 만달로어인 집단-딘 자린이 속한 집단은 주류 집단이 아니라 근본주의적 성향을 띠는 집단임.-의 계율 '진정한 만달로어인은 헬맷을 벗지 않음'을 깨기까지 한다.


 이러한 애착관계를 형성하게 된 건 딘 자린이 그로구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기 때문인데,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딘 자린은 전쟁고아였다. 어린 시절 자신의 마을을 전멸시킨 드로이드에 의해 사살당하려는 찰나, 한 만달로어인에 의해 구출되고 파운들링-만달로어 태생이 아닌 고아. 만달로어인의 계율에 따라 이들은 나이가 차거나 자기 종족에게 돌아갈 때까지 만달로어인에 의해 돌보아지며, 만달로어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으로서 살게 된다.


 그로구 또한 전쟁에 휘말려, (그의 능력을 탐내는 어둠의 세력을 피해) 홀로 외롭게 숨어서 살아남았다. 그러다가 딘 자린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로구 또한 드로이드에 의해 사살당하려는 찰나 딘 자린에 의해 구해진다. 그렇게 딘 자린은 자신을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아이를 내버려 두지 않기로 선택한다. 함께 은하계를 유영하는 과정에서 그로구는 딘 자린을 종종 곤경에 빠트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딘 자린은 그로구를 버리고 다시 고독한 총잡이로 돌아갈 수 없다. 이미 둘은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했으며, 서로를 돌보는 존재로 이어져 돈독한 유대와 애착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시즌1 피날레에서 그로구는 정식으로 딘 자린의 파운들링이 된다.)



 스타워즈 시리즈를 관통하는 서사는 언제나 '부모와 자식'이었던 것 같다. 아마 <만달로리안>도 동일한 방식으로, '부모 되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딘 자린과 그로구가 혈연이 아니라는 사실이 <만달로리안>을 '어른 되는' 이야기로 읽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건, 딘 자린이 처음부터 완성된 '다정한 어른', '따뜻한 어른'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만달로리안>에는 <나의 첫 심부름>처럼 완성된 '다정한 어른', '따뜻한 어른'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로구의 강력한 능력-포스-과 상관없이 그로구를 아이로서 대하고 보살피는 어른들 말이다.)


 처음 딘 자린의 모습은 서부극에 흔히 등장하는 고독한 총잡이다. 하지만 <만달로리안>은 고독한 총잡이의 환상(판타지)을 유지하고 강화하지 않는다. 딘 자린의 '고독한 총잡이'라는 설정은 그가 그로구와 만난 이후 무너지기 시작한다. 앞서 딘 자린이 점점 변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성장'이기도 하다. 고독한 존재에서 벗어나 다정함을 받고, 또 건넬 수 있는 어른으로의 성장 말이다. (그리고 이 다정한 성장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 시즌3을 그 누구보다도 기다리게 만든다. '다정한 세상이 따끔따끔 피어난다'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딘 자린이 그로구에게 보여준 다정함은 태생적이라기보다는 선택적이고, 선택의 이유(동기)는 딘 자린이 그로구에게서 자신과의 어떤 닮음 혹은 이어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사를 차지한 주인공들의 '운명'이라는 말로 둘을 묶을 수도 있겠지만, 글쎄다? 딘 자린에게 그로구는 '예상치 못한 프레임 밖의 존재'였을 거다. 신원미상 50세의 현상금을 노리고 갔는데, 웬 아이가 있었으니 말이다. 딘 자린이 그로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발견했더라도 아이에게 다정해지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여전히 딘 자린은 고독한 총잡이로 남았을 거고, (상상하기도 싫지만) 그로구는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을 거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의 프레임 밖에 있던 존재들이 보여주는 (선택된) 선의와 다정의 힘은 어떠한가? 그 힘은 현상금 사냥꾼과 포획 대상처럼 가장 큰 대척점에 있는 이들이 같은 프레임 안에 머물기를 선택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동력이 된다. 동시에 우리가 <나의 첫 심부름>에서 소타를 위해 사과를 구해낸 어른에게 감동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프레임 밖에서 나타난 어른 A는 왜 (그에게 낯선 어린이인) 소타에게 사과를 건네주고 홀연히 사라졌을까? 그건 아마도, 그 어른도 소타를 보며 어린 시절에 겪었던 곤란이나 도움이 필요했던 순간들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떠올렸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어른 A는 기꺼이 (자신과 전혀 무관한 존재인, 하지만 실낱같은 이어짐이 있는) 소타에게 사과를 주워주길 선택했다. 나는 어린이에게 다정한 세상은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자신의 프레임 밖 존재(이지만 언제든 서로의 프레임에 머무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에게서 자신을 떠올리는 것, 그렇기에 기꺼이 다정해짐을 선택하는 것.



Be kind!



 맨 처음에 말했듯, 우리 개개인이 그려낸 자신만의 경계선은 자의적이다. 접점이 있든 없든 문득, 불쑥, 예기치 않게, 어떤 방식으로든 어린이가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그저 차를 운전하며 지나가는데 한 아이의 사과가 차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거나.) 대학 시절, 학교 근처 다이소에서 한창 쇼핑을 하고 있는데 엄마와 같이 온 한 어린이가 나를 빤히 쳐다본 적이 있다. 왜 그러나 싶어서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니, 그 자그만 손으로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영차 여는 것이다. 그러더니 자신의 가방 안에 소중히 지니고 다니던 사탕-미니 츄파츕스였다.- 하나를 내게 건넸다. 아이의 엄마와 나는 동시에 빵 터졌고, 덕분에 몽글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그 공간을 떠날 수 있었다. 그 애는 왜 나에게 사탕을 건네었을까? 나도 저랬나?

     

 대화 소리보다 노트북 타자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는 대학가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눈앞으로 "아빠 빨리 와!"를 외치며 뛰어가는 한 어린이가 지나간다. 누군가는 시끄럽다고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보다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바닥 위에서 뛰는 아이가 혹여 넘어지지는 않을까, 하고 아이의 신난 발걸음을 눈으로 좇길 선택해 본다. (어린 시절 박물관 특유의 미끄러운 바닥 위에서 폴짝폴짝 뛰고 돌다가 넘어진 전적이 있으므로.. 제주도 테디베어뮤지엄에서 혼자 넘어지고 혼자 울고 혼자 극복하던 모습이 무려 영상으로 남아있다. 왜 그때 내 곁에는 다정한 어른은 없고 영상을 찍는 아빠만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떤 이어짐을 발견하기에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 어른이 된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지금의 어린이를 목격하고, 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린다. 그 과정을 통해 실낱같은 이어짐을 느낀다. 내가 거쳐온 시간을 유사하면서도 사뭇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는 이들에게 기꺼이 다정해지기를 선택하고 싶다.


오늘의 글에서는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에 대해서만 실컷 떠들었지만, 사실 이 선택된 다정함의 법칙은 세상 모든 곳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좀 더 큰 꿈에 대해서도 적어본다. "개개인의 존재가 선택한 다정함이 모여 더 크고 다양한 다정함이 피어오르고, 그렇게 만들어진 다정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가망 없는 희망사항인가 싶다가도, 처음부터 완성된 다정함은 없으며 오직 따끔따끔 피어오를 뿐임을 되새겨본다. 그러니 희망을 잃을 순 없다.


추신 1.

2020년의 어느 날, 나와 동생의 문자 中


2020년의 어느 날, 아직 대학 졸업자가 아니라는 나에게 동생은 "언니 어쨋든 훌륭한사람되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문자를 받은 이후 오래도록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던 말인데, 오늘은 조금 변형해서 마음에 꼭꼭 새겨본다. 그래, 언니가 어쨌든 다정한 사람은 되어볼게.


추신 2.


선택된 다정함의 힘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더 딥하게 맛볼 수 있음.






아트인사이트 컬쳐리스트로 활동하며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2923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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