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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Mar 22. 2023

이토록 급진적인, 비혼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23 겨울 강좌 - 가족구성권 3강 후기

지난달에 열린 여성문화이론연구소 겨울 강좌에서, 가족구성권 파트 3강 '가족의 안과 밖을 질문하는 퀴어-비혼정치: 언니네트워크의 비혼운동을 중심으로'(나기) 파트가 중요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간단히 기록을 남겨 둔다. 비혼 운동의 역사를 쭉 읊어 주었을 뿐인데, 나에겐 너무나 새로운 이야기였다. 강의에 이렇게 몰입한 건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이 강의가 끝난 후 나를 만난 사람들은 다 한마디씩이라도 이 얘기 들었을 것 ㅋㅋ



비혼은 시대 변화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그 역사는 꽤 깊다    

 

조선시대에도 결혼하지 않는 여성들이 있어서 혼인 장려책 등이 시행되었다는 점, 당시 그런 여성에 대한 기록들이 재미있었다. 역시 억압받는 시대라고 해서 고스란히 억눌리기만 하는 건 아니야..! 하면서. 나는 《제국의 위안부》를 내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책 중 하나로 꼽는다. 성매매를 하게 될 것을 알았음에도, 가족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위안부 자원을 통한 출국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는, 너무나 그럼직한 사실이 곧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그 책의 어떤 대목을 읽었을 때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책의 출간 의도나 정확성, 저자의 행보 등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의 저서의 어떤 부분으로 말미암아 과거 시대의 어떤 여성들과 연결된다고 느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가와 가족과 남성의 보호를 거부하고 자유롭고자 했던, 그러나 그 선택을 유학 등 멋진 것으로 선택할 만한 자원은 갖지 못했던 사람들. 나는 시대를 넘어 그들에게 연대하고 싶다.

그렇게 동시대인이 아닌 어떤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별히 자기 언어를 남길 수 없었던 민중들과 연결된다고 느끼는 경험은 소중하다. 국가가 아니라, 혈연이 아니라, 친분이 아니라, 업적이나 능력에 대한 경외심이 아니라,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저항했구나 하는 공감으로 연결되는 것은 어마어마한 내적인 힘이 되는 것 같다.     



비혼은 운동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비혼이란 트위터 등 온라인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4B/6B 운동의 하나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전부터 비혼이라는 개념이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나기의 표현을 빌리면 “돌봄을 제거한 몸” 되기, “남성화” 정도로 느껴졌다.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스스로 능력을 키우고 기반을 만드는 것.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은가? 그렇게 살 자신이 있기는 한가? 하면서 나를 비혼으로 정체화하기를 회피했다.

그런데 세상에 원래 의미의 비혼은 너무나 내 언어였던 것이다... 비혼은 나만 돌보는 게 아니라 가족 바깥에서 동등한 시민으로서 돌봄의 관계를 만들어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2005년 호주제 폐지 당시 언니네트워크의 “가족의 위기가 아니라 가족 때문에 문제…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는 것에 반대한다” 주장 너무 맞는 말이고…(가족제도 못 잃는 여연... 뭐해!) “결혼안당근주의”라니 1999년의 영페미들 너무 귀여운 거 아닌가? 2007년 비혼 여성 축제, 2008년 비혼 PT 나이트 이런 거 너무 훌륭한 기획이다... 나도 가고 싶다... 이러면서 들었다. 어쩌다 지금 비혼 이미지 트위터에서 축의금 내기 싫다는 등 개인적인 손해만 투덜거리는 찌질한 이미지가 됐지? 하고 생각했다. 넷페미들 좀더 정치적으로 비혼을 말해 줬어야지?!(라고 괜히 자신을 수동적인 위치에 놓아 본다)     



비혼 운동은 왜 오해되고 있는가     


강의에서는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혼인률 저하와 저출생이 남성 청년의 위기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돈 없으면 결혼 안 한다는 여자들’ 때문에 남성 청년들이 정상 생애 주기 이행에 곤란을 겪는다는 것이다. “연애의 곤란, 결혼의 지연을 곧장 친밀성의 위기로 보는 관점”이라는 이박혜경의 지적이 정확하다고 느꼈다. 여하튼 이런 괴랄한 남성 청년 우쭈쭈해 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갑갑하다! 돈 없어서 결혼 못 한다고 찡찡대는 어떤 실재하는 남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너네가 돈으로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리면 되잖아!), 근본적으로는 계급 문제를 젠더, 세대의 문제로 왜곡하는 언론과 정치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뒤로 다양한 친밀성을 가시화하고 ‘그 가족’ 바깥에서 살아가는 미래 계획을 하는 시도들이 이어졌다고 한다.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지는 한편 여성들의 정치적 운동으로서 비혼은 전승되지 못한 것일까, 혹은 내가 무지했을 뿐일까. 아무튼 우리 세대 많은 여성들이 비혼을 정치적인 언어로 발화하지 않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건 앞서 말한 정치권과 언론의 왜곡 때문이기도 할 테고, 급격한 신자유주의화 속에서 사람들이 돌보고자 하는/돌볼 수 있는 범위가 협소해지면서 ‘가족 바깥 돌봄’보다는 ‘(여성이고 약자인)나만 돌보기’만 상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 위기를 청년 남성의 문제, 혹은 청년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과 결혼·가족 제도의 문제로 인식하는 (남성을 포함한)청년들의 보편적 돌봄 제공자되기로서 비혼 선언을 다시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를 내 일로는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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