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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Apr 04. 2023

어떤 말을 버리고, 또 버리지 말아야 할까

〈우리는 인간이다〉상영회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은유란 무엇인가》

이따금씩 텍스트가 나에게 온다. 이제는 알아야 할 때라고 깨워 주듯이. 이정은 활동가가 무심히 초대해 준 〈우리는 인간이다〉 상영회와, 포스터를 붙이러 들른 서점 풀무질에서 우연히 만난 이길보라의 책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김용규·김유림의 《은유란 무엇인가》가 의도치 않게 이어지며 배움을 만들었는데, 그 과정이 나름 재미있어서 남겨 본다.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해 전혀 하나도 모르다가 영화를 봤다. 일정한 배경 지식을 전제하는 영화라서 재일조선인 탄압 문제를 다룬 초반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후반에 한국인을 포함해 일본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 난민 신청자들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부분에서 급 몰입했다. 기능 실습, 즉 직업 ‘교육’은 어떻게 착취의 빌미가 되는가. 직업계고 현장실습 문제와 겹쳐 보게 되었다.     


그러다 뜻밖에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에서 재일조선인 문제를 다시 만났다. 이길보라는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살며 디아스포라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재일조선인과 나눈 공감에 대해 이야기한다.(이 책은 그와 같이 코다 정체성, 또는 가족이라는 화두를 매개로 공감을 나눈 어떤 사람들에 대해, 영화와 책을 소재로 이야기한다.) 재일조선인이 해방 이후 일본에서 분단과 함께 국적을 잃고 난민이 된, 더 정확히 말하면 북한을 적으로 돌리는 데 동의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내가 만약 그 시대 한반도에 살지 않는(못하는) 조선인이었다면 분명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시민권을 잃고 고유한 문화의 계승(조선 학교)을 인정받지 못하며 차별받고 고립된다. 분단에 저항하는 것이 삶을 근간부터 위협했다.     


상영회에서 나온 청중 의견 중에는, 영화의 제목이 비인간동물을 배제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사실 그 질문이 흥미롭지 않고 피로하게 느껴졌다.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의 답이 예상과 달랐다. 그는 서툰 한국말로 말했고, 나는 이동 중이라 필기를 하지 못했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내가 만난 재일조선인들은 우리 인간이라며 자신들을 인정하라고 말하기보다 다른 차별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우리 모두 같은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를 담고 싶었다.’ 사실 영화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왜 우리‘도’가 아닌지 궁금했었다.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 그러나 청중의 문제 제기에는 다소 빗나가는 것 같았고, 더 고민하게 됐다. ‘우리는 인간이다’라는 말에는 분명 대체 불가능한 힘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비인간 동물을 은연중에 배제하지 않기 위해 그 말을 버려야 할까?     


그러다 《은유란 무엇인가》에서 그 문제 제기의 맥락을 다시 이해하게 됐다. 범죄를 맹수에 비유한 문장이 들어간 글을 읽은 사람들과 바이러스에 비유한 글을 읽은 사람들, 각 그룹에서 말하는 범죄 해결책에 대한 생각이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사례가 있었다. 맹수 그룹은 범죄자 색출과 검거를 중요한 대처 방안으로 제시했고, 바이러스 그룹은 빈곤을 포함한 각종 범죄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사전 예방 조치를 우선으로 꼽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그가 문제 제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의 맥락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권리를 가진 자를 ‘인간’이라고 표현할 때 인간이 아닌 자들은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 무의식의 축적이 때로 무서운 무관심과 방관을 만드는 걸 테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고민스럽다. 너무나 명백한 삶의 위계화 앞에서, 어깨를 결며 ‘우리는 인간이다’라고 말하는 그 마음을 응원하고 싶어서다. 내가 문제 제기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이, 자칫 더 좋은 표현을 생각해 내지 못한다고 해서 어떤 이를 비난하는 것처럼 다가갈까 걱정스럽다. 나는 어떻게 생각을, 또 생각에 대한 생각을 표현해야 할까.


etc.

- 북토크의 경험도 책과 별개로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다. 농인인 이길보라의 어머니가 하루 전에 북토크에 참여를 결정했는데 통역이 준비되지 않아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이 있었다. 서점에서는 꽤 괜찮은 자동 자막 기능을 활용했지만 분명 한계가 있었고, 더군다나 문자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어머니는 20%밖에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길보라는 음성 언어로 북토크에 임하면서도 간간히 필요한 경우 수어 통역을 해야 했다. 한 사람을 빼고 모두가 청인인데 그 중 한 사람만이 수어를 할 줄 아는 상황.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은 묘사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다. 그 상황은 너무나 생경하고 불편했다. 이길보라는 “여러분은 지금 코다의 삶을 보고 계시다”라고 말하며 음성 언어 중심 사회에서 농인의 활동 반경이 얼마나 제한되는지,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와 통역 어느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코다의 당혹에 대해 이야기했다. 수어 통역의 필요성을 넘어 수어 사용 보편화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부터 조금씩 배워 보기로 마음 먹었다.(그런데 당연히 쉽지 않고, 공식 교육 과정은 도저히 일과 병행할 수 없을 만큼 빡세서 약간 기가 꺾였다.)     


- 생각해 보면 내가 기억하고 또 인용하거나 오마주하는 문장들은 은유를 사용한 것인 경우가 많았다. 단지 글을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글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힘을 만드는 것이 은유이구나 생각했다. 한편 여성이 은유되는 보편적인 방식이 참 싫다고 새삼 느꼈다. 《은유란 무엇인가》에도 〈일 포스티노〉의 예를 들며 여성에 대한 과잉 성애화가 묻어나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는 철저한 현실 반영이기도 하지만 실망스럽다고도 느꼈다. 그럼에도 뇌의 어떤 움직이지 않던 부분을 자극하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이어질 2, 3권이 기대된다.  

   

- 완전히 딴 얘기지만, 이길보라의 유학이 꽤 제대로 된 대학 다님이었다는 걸 며칠 전에야 알았다. 순진하게도 유학이라 했을 때 그 나라를 경험하는 거라고 생각했지 대학을 떠올리지 않았던 것이다. 혼자서 속으로 그를 흙수저 비진학 동지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고 내심 간접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던 터라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계속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나는 외롭다.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대학 가지 않고도 대학 다닌 사람과 동등하게 인정받으며 사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은 불안하고 외로워지는 일이다. 가난하게 살기는 각오했다. 다만 무시와 차별이 두렵다. 그 때문에 주눅들고 후회하게 될까 봐 두렵다. 다들… 대학 그만 가… 나랑 같이 대학 안 다녀도 충분히 잘 배우고 멋지게 일하며 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자….


[인디그라운드] 우리는 인간이다 https://indieground.kr/indie/movieLibraryView.do?seq=4514&type=D


[교보문고]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0861666


[교보문고] 은유란 무엇인가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079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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