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2023에 다녀와서, 활동가 성장과 전승에 대한 고민
지난 토요일 오전,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거짓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열사 이야기〉, 〈발달장애인이 투쟁할 때_2022 420 투쟁일기〉로 이어지는 단편 세션을 봤다. 연잎의 표현을 빌리면 “거짓말이지만 거짓말이 아닌”, 활동 지원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그걸 얻기 위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구조가 얼마나 그의 자긍심을 해치는지 온몸으로 말하는 〈거짓말〉의 결말의 울림이 컸다. 그러나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조금 다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열사 이야기〉는 장애인 야학의 교사 두 명이 장애인 학생이자 활동가 두 명과 각각 짝을 지어 박기연 열사와 인천 지역 장애 운동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의 영화다. 나는 줄거리가 본격 시작하기도 전에 남들과 아주 다른 엉뚱한 모먼트에서 눈물을 쏟았다. 교사가 “자, 규칙이 있어. 서로 반말을 쓰는 거야.”라고 말하자 학생이 “응.”하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교사는 저항 없이 웃음을 터트린다. “아, 당황스럽다.”라고 말한다.
그 장면은 10여 년 전쯤 그러니까 중학생 때의 기억과 감정을 소환하게 했는데,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감각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수나로 활동을 시작하고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모든 인간관계가 재편되었으니, 그 후로 나에게는 ‘선생’이 없었다. ‘선배’도 형식상 없었다. ‘동료’만 있을 뿐이었다. 그건 모종의 해방감을 줬다. 더 나은 세상을 먼저 살고 있다는 선민의식 비슷한 것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무지하게 외롭고 불안하기도 했다. 내가 선택한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달리 어찌할 방법을 몰랐다.
나는 사실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제도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에 그 바깥의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대학도 가고 싶었다. 정확히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예 기간을 가지고 싶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자퇴를 할 때는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모르는 걸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사람, 아니 그전에 내가 뭘 모르는지 알려 줄 사람이 필요했다. 아니, 나를 지켜봐 주고 기다려 줄 사람이 필요했다. 원가족은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지 못했고 나는 어디서 그런 사람을, 공동체를 찾아야 하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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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운동을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자꾸 내 미성숙함을 맞닥뜨리게 된다. 무지한 건 문제가 아니다. 속된 말로 눈치가 없는 게 문제다. 따라가면 안 되는 자리를 따라가기, 일어서야 할 타이밍을 모르고 눌러앉아 있기, 쉴 새 없이 떠들기, 그러다 말 실수하기, 무례하게 행동하기, 사과할 타이밍 놓치기, 표정 관리 못하기, 대답 제때 못하기……. 당시에는 모두에게 아주 담담하고 뻔뻔해 보였겠지만 집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하루는 내 인성에 대체 무슨 문제가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늦은 밤에 청소년운동을 같이 했던 두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사람은 내 또래의 활동가였는데 그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너에게 관심이 없고 금방 다 잊었을걸. 계속 그런 생각하면 정신병 걸려. 그만 생각해”라고 일축했다. 한 사람은 나를 가장 오래 봐 온 ‘선배’ 활동가였다. 그와의 대화는 매우 흥미로웠다.
“공현, 내가 요즘 청소년 운동 바깥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까 있잖아, 내가 너무 눈치가 없는 것 같아.”
그는 막 웃으면서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너 원래 눈치 없어!”
“그래? 그런데 아무도 나한테 안 알려 줬어!”
“우리들은 대부분 다 눈치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눈치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분위기에 가까웠지.”
“그래? 어? 그러고 보니 너도 진짜 눈치가 없네!”
“응. 나는 눈치를 안 보지.”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 온 청소년운동의 뒤풀이에는 뉴비(newbie)가 끝까지 섞여 있는 게 디폴트 값이었고, 적어도 나와 내 가까운 동료들의 경우에는 뉴비가 먼저 떠나는 것 자체를 기대하지 않았다. (경험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하고 체념한 것에 가까울지도.) 무엇보다 각자의 행동과 반응 패턴이 아주 다종다양했다. 물론 어디서든 그렇듯 매너가 좋고 유머러스한 사람은 인기가 있었지만, 공현의 극단적인 눈치 거부 행위가 선도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특이한 행동 양식들도 그런대로 받아들여지는 편이었다. 누군가 무례하거나 부적절한 언사를 했을 때 그걸 돌직구로 지적해서 상처를 주는 문제는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 역시 눈치 보지 않음의 일종이자,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잘못을 하면 바로 지적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을 때 한결 편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누군가 나한테 알려 줬으면 좋겠어. 여기는 네가 끼지 않는 게 좋겠다- 이런 거.”
“글쎄? 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어서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글쎄…….”
“말해 주지 않는 것까지 짐작하지 마. 그러자면 끝이 없을걸.”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나니 그날 하루는 편히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어떤 자리에 갈 때마다 몹시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떤 행사에서는 뒤풀이에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분주하게 뛰쳐나왔다. 어떤 행사에서는 뒤풀이에 갔지만 나름 너무 늦지 않게 깔끔하게 일어서서 유쾌한 배웅을 받으며 걸어가면서 낯선 성취감을 느꼈다. 누군가 친분이 있는 사람과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정서적 안정에 지대한 도움이 됐다. 하지만 늘 누군가가 함께 가 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행사는 많고, 사람들은 바쁘고, 나는 친구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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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출판계 선배에게 야간 대학이라도 다녀 보라는 조언을 받았다. 비슷한 그룹의 사람들만 만난 것이 약점일 수 있다고, 생각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껴 보면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 말에 설득되어 알아보았지만, 현재 직장은 야간 대학 수준의 고정 일정을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서 포기했다. 그러나 그 조언은 나에게 풀리지 않는 고민을 남겼다. 사람을 다양하게 만나 보지 못하고, 공동체나 조직에 속해 본 경험이 적음에서 오는 이 미성숙함을 어떡할 것인가. 언제까지 이렇게 최선에서 거리가 먼 선택을 하고 스스로를 향해 연소자 비하 발언을 되뇌이면서(동지들아 미안) 살아갈 것인가?
얼마 전에는 지방에 사는 한 ‘후배’ 활동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아수나로 상근 활동을 하던 중에 혹은 회고하며 쓴 글들을 읽었고 깊이 공감했다며, 언제 한 번 만나서 더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했다. 특히 다른 한 활동가가 운동 경험이 전승되지 않는, ‘선배 없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도 전했다. 그는 조직 내에서 실무를 주로 맡아서 처리하면서 권력자의 위치로 문제 제기를 받는, 과거의 나와 너무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나는 뭐라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고 안타깝고 미안하기만 했다.
관계 자원이 빈약해서, 경험을 전승받지 못해서 시행착오와 외로움, 막막함, ‘성장하지 못함’의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나에게 모종의 위로와 책무감을 함께 준다. 나의 가지지 못함을 연민하기보다는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덜 넘어지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다. 그러려면 내가 더 많이 누리고 있는 것들, 비장애인 시스젠더로서 여러 차별을 피할 수 있었고, 서울에 살고, 읽기에 익숙하고, 출판이라는 일을 하고, 운 좋게 어떤 배움의 자리들과 연결되었던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내게 비어 있는 부분을 채워 가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내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 말이다.
오늘 한 퀴어 ‘선선배’ 활동가를 만났는데 그는 지방 활동가들과의 교류를 고민하면서 귀엽도록 창의적이고 원대한 하나의 방안을 상상하고 있었다. ‘셀럽’ 활동가들이 공공기관 등에서 주최하는 지방 강연을 초청받아 갈 때 그 지역 활동가들의 초대에 따라 무료로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일정 공유 플랫폼 같은 걸 만드는 상상이었다. 실현 가능성과 별개로 그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됐다. 그래, 모두들 고민하고 있으니까, 더디지만 무언가 나아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미성숙한 단상을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