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인증샷 찍어줄 사람이 없을지라도
며칠 전, 서울에 갈만한 전시회가 있나 찾아보다가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전시회를 알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이다. 10년 동안 비행을 하면서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미술관을 몇 군데 다녀왔다. 뉴욕의 모마, 영국의 테이트 모던,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이 기억에 남는 미술관이다.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회 예약을 하며 부끄러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외에 있는 미술관은 그렇게 여러 곳 다녀왔으면서 정작 국립현대미술관을 가보지 않았다니, 어디 가서 말하지 말아야지.
전시회 예약한 시간은 낮 12시, 초행길이라서 혹시나 길을 못 찾을까 봐 일찍 집을 나섰다.
'이 길이 연인과 걸으면 무조건 헤어진다는 덕수궁 돌담길이구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돌담길을 걸었다. 길치인 내가 한 번에 길을 잘 찾다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정각에 관람권을 발급받고 기대하던 전시회에 입장했다. 그런데 어쩐지 좀 이상하다. 어딜 봐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전시 제목을 볼 수 없었다. 뭐지? 다른 층에 있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내하시는 분에게 물어봤다.
"혹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는 지하에서 하는 건가요?"
"네? 여기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에요. 그 전시를 보시려면 덕수궁관으로 가셔야 해요. 예약도 따로 하셔야 하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전 분명히 덕수궁관에서 하는 전시를 예약했어요"
그때서야 알아차린 내 실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 '덕수궁'에서 하는 전시는 다르다는 것이다. 첫 방문이니 모르는 게 당연한 건가 싶다가도, 혹시 일행이 있었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테지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누군가와 같이 왔다면 예약을 한 번 더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을 테고, 그러면 전시를 잘못 오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는가, 급한 불부터 꺼야지. 다급한 마음에 다시 홈페이지에 가보니 다행히 덕수궁관에서 하는 오후 2시 전시회를 예약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 간 전시회는 소격동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었고, 그곳에서는 '올해의 작가상'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미 내 마음은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회에 가 있었으므로 다른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시간 정도 전시를 둘러본 후 덕수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0여분을 걸어서 덕수궁에 도착했다. 평일 낮이었지만 덕수궁에는 봄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찌감치 봄은, 이미 덕수궁에 와있었다. 곳곳에 햇빛을 잔뜩 머금은 꽃들과 곧게 뿌리내린 소나무가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는 듯했다. 유럽의 그 어떤 명소들을 갔을 때보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고즈넉하면서도 특별한 운치가 느껴졌다. 나는 덕수궁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한참을 꽃, 하늘, 소나무, 덕수궁을 찍다가 2시가 지나서야 전시회에 입장했다. 이미 볼 것이 많은 전시회로 소문이 난지라 사람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온 관람객들도 있었고,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도 있었다.
멋있게 차려입고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4-50대로 보이는 여성분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는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그분의 뒷모습을 감상했다. 혼자 미술작품을 보고 있는 그분의 뒷모습이 어쩐지 근사하게 느껴졌다.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전시를 즐겼다.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롯이 혼자 즐기는 전시회, 내가 더 보고 싶은 작품을 오래도록 감상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 전시회를 혼자 가서 가장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전시회에 같이 가면,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동선에 더 신경 쓰게 된다. 나는 이 작품을 더 보고 싶은데, 일행이 멀찌감치 가있으면 얼른 보고 따라가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든다.
서로 인증샷을 찍어주는 사람들을 보며 살짝 부럽기도 했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2시간의 시간을 꽉 채워서 여유 있게 전시회를 감상하고 나왔다.
전시회를 같이 갈 연인이나 친구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딱히 아쉽지는 않다. 이미 여러 번 혼자 전시회를 다녀왔기에 혼자 가는 전시회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전시회보다 혼자 가는 전시회가 더 호사스럽다.
매년 3월이 되면, 달콤하게 속삭이는 덕수궁의 봄이 생각날 것 같다. 그럴 때면 주저하지 말고 혼자 전시회를 예약해서 덕수궁에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