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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소라빵 Feb 29. 2024

파묘, 우리 손으로 묻은 치부에 대해

역사는 땅과 같다. 선대가 뿌리내리고, 가꾼 뒤 몸 뉘인 땅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땅 위로는 선대들이 남긴 풍족한 문화가 가지를 뻗고, 아래에는 찬란한 유산이 묻히지만 차마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서 혹은 사람들을 눈을 피하기 위해 파묻은 치부도 공존한다. 우리가 선조의 묘를 파헤칠 때, 거기서 고개를 빼 드는 것은 선조들이 남긴 유산일까? 아니면 오래된 망령일까?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중 풍수사로 등장하는 최민식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더라도 수많은 불확실성과 마주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의 일상 속엔 비논리적인 종교와 미신이 자리 잡는다.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도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미역국을 의식적으로 피하거나, 부모님과 함께 절이나 교회를 방문해 학업 성취를 기도한 경험이 한번 식은 있지 않는가? 특히 한국은 민간신앙 풍수지리와 땅이 얽혀 인간의 의사결정에 수많은 영향을 주는 곳이다. 영화 속 풍수사에게 조상이 묻힐 명지를 추천받는 재벌의 모습은 현실의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서울에 위치한 잠실 롯데타워도 풍수사가 점지한 땅 위에 세워졌다나 뭐라나..


풍수지리에 따르면 땅은 사람의 혈관처럼 기운이 운반되는 길이다. 이 기운을 사람이 접하면 복을 얻을 수 있고, 땅 속에 묻혀 직접 생기를 받아들이는 죽은 자 더 크고 확실한 생기를 얻는다. 특히 죽은 자가 얻는 생기는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진다고 믿었는데, 때문에 수많은 왕과 귀족 오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조상을 묻을 명당을 찾기 위해 풍수사를 고용하곤 했다. 그리고 풍수를 따질 때 필연적으로 엮어오는 땅은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국난과 경제적 어려움, 후 가파르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땅과 건물에 자본이 묶여버린 정치적 상황과 지방 소멸의 문제까지.


 그래서인지 정통 가톨릭 엑소시스트를 소재로 한 <검은 사제들>, 기독교와 불교 세계관을 다룬 <사바하>와 달리 <파묘>에는 한국 사회의 기묘한 모습을 서슴없이 파헤치는 쾌감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야기는 오컬트 장르를 기반으로 전개되지만  무당(김고은과 이도현), 풍수사(최민식), 장의사(유해진) 등 직업인이 소명의식을 다하기 위해 분투하는 전문가물로서 성격도 갖춰 공포감만 조성하는 오컬트 영화와 비교해 다른 을 낸다.


 오늘은 오컬트 장르로서 얕게 파든, 한국의 기형적인 종교와 역사를 떠올리며 깊게 파든 관객이 마음껏 굿판을 펼칠 수 있는 영화, <파묘>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우리 손으로 묻은 역사를 파헤치며 시작하는 이야기

 앞서 언급하듯, 땅은 역사가 층층이 쌓인 지층과 같다. 깊숙이 파내려 갈수록 오랜 역사와 함께 민족이 겪었던 상흔과 한 편에 묻어  치부 하나씩 얼굴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파묘>에서 가장 먼저 파헤쳐지는 대상도 한국전쟁 이후, 경제성장의 주역이 되었던 재벌의 묘이다.


 무당 화림(김고은)은 대물림되는 유전병으로 고통받는 한 재벌의 요청으로 미국 LA를 방문한다. 화려고 넓은 집의 규모에서 짐작되듯, 의뢰인은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막대한 부를 축적한 한국계 이주민이다. 조상의 묫자리가 병의 원인임을 단번에 파악한 화림은 장손에게 이장을 권하며, 묫자리의 전문가인 풍수사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이 팀에 합류 전문가 팀이 꾸려진다.

오컬트 장르에 전문가 장르가 결합해 흥미진진한 도입부를 보여준다

 오래간만에 들어온 큰 의뢰에 신이 난 네 사람이지만, 수많은 전래동화와 공포영화가 그렇듯 어기는 즉시 죽음으로 직결될 수도 있는 금기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의뢰인의 할아버지가 묻힌 곳 사람이 묻혀선 안 되는 악지 중의 악지였.


"전부 잘 알 거야... 묘 하나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풍수가 권력과 깊이 연결된 우리나라에서 명문가가 조상을 일부러 악지에 묻었을 리는 없다. 누군가가 이들을 속여 악지에 조상을 묻게 했다. 좋은 기운이 넘치는 곳에 묻힌 령 생기를 후손에게 전해주듯, 나쁜 기운이 가득한 악지에 묻힌 령은 원한을 쌓은 끝에 후손을 해치기 때문에, 이 묘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악의마저 느껴진다. 부자들에게 여러 번 묫자리를 주선해 준 상덕이기에 그가 묫자리에서 발견한 이상한 점은 한 둘이 아니다. 부자들의 묘치고는 소박한 데다, 마치 누구의 묘지인지 숨기겠다는 듯이 비석에는 투박한 필체조차 새겨져 있지 않다. 그리고 장손을 비롯한 의뢰인 일가는 무언가를 아는 눈치이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진상을 물어봐도 오리발을 내밀기 일쑤이다.


 일을 거절하려 한 상덕이었지만 화림의 설득과, 신병으로 죽어가는 의뢰인의 아들을 차마 저버릴 수 없어 령의 원한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굿과 함께 파묘가 시작된다. 그렇게 재벌가에 얽힌 비밀과 묘의 진실이 하나씩 파헤쳐진다.


묵힌 치부와 원한은 제령이 필요하다
영화의 큰 반전이기도 한 오니. 포스터에도 한쪽에 뿔이 드러나 있어 오컬트 마니아라면 알아볼만한 요소였다.


<파묘>에는 장르의 문법에 따라 숨겨진 반전이 존재한다. 그 반전은 의뢰인 일가 친일에 앞장서 부를 축적한 집안이며, 할아버지묘 아래에는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자행한 특수한 주술이 존재다는 것이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할아버지가 악지에 묻힌 이유도 일제의 풍수사가 그곳을 양지라 속였기 때문으로, 주술을 숨기는 위장으로 사용함과 동시에 악지에 묻 령이 악령이 되어 주술을 지킬 것을 예상한 안배였다. 할아버지의 묘 아래에는 주술의 중심인 쇠말뚝이 있는데, 악령이라는 중간보스를 넘어선 퇴마사들이 최종보스 격인 일본귀신(오니)을 퇴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본 뒤  곱씹어보면, <파묘>는 민족의 정신을 깊숙한 곳에서부터 훼손하고자 한 일제와 퇴마사들의 대결이라기 보단, 족의 상흔을 파헤치고 위로하고자 한 굿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처럼 우리 역사에는 일제가 박은 못과 거대한 상흔이 존재한다. 그러나 재벌일가 그랬듯, 가 남긴 수많은 원한과 상처를 근대화와 산업화를 명분으로 급하게 매장해 버린 건 다름 아닌 우리들의 손.  그곳이 양지인지, 악지인지 조차 따지지 않은 채 말이다. 절한 절차를 밟지 못하고 매장된 령은 원한 쌓인 끝에 악령이 된다. 그리원령이 돼버린 지난 역사는 언젠가  목을 졸라 올지도 모른다. <파묘>가 파헤치고자  이야기는 바로 우리가 제대로 반성하지 못하고 외면하며, 깊이 묻어버린 우리  역사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며 딩 크레디트를 반쯤 감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파묘된 묘의 더욱 심층에 자리한 비밀을 파헤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처럼, 오래 케케묵은 원혼은 파헤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급하게 뚜껑을 열었다간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 상흔을 옅어지게 만들기 위해선 굿과 같이 적절한 제의와 절차가 필요하다. 영화에선 바로 무당이 등장할 차례이다. 무당은 죽은 자가 돌아간 직후에 만들어지는 묘와는 다르게, 생전에 해결하지 못한 한이나 비애를 시간이 지난 후에야 굿으로 대리해 풀어주는 존재이다. 즉 상덕의 역할이 우리가 미처 다 파내지 못하고 외면했던 이야기를 발굴하는 이라면, 화림은 우리 손에 들어온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끌어안는 통로 역할인 셈이다. 그래서 시체를 처리하는 장의사에서 시작해 그 시체가 몸 누일 장소를 찾는 풍수사, 그리고 생전에 풀지 못한 한을 대신해서 풀어주는 무당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제의는 마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역사에 대한 책임 의식을 대신해서 파헤치고, 짊어지며 해소하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다.



성급한 매장을 위로하며

 이 영화를 보며 잊어서 안 되는 사실이 하나 더 떠올랐다. 오컬트 장르에선 실제로 귀신이 존산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엄격한 장례와 구마절차가 필요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장례문화나 종교는 전부 산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죽은 사람을 가슴속에서 떠나보내기 위해, 그가 생전에 품은 원념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여러 절차를 밟아가며 죽은 이를 기억의 저편에 묻는다. 러나 올바른 절차 따라 원한과 감정을 떠나보내지 않으면 산사람은 죽은 이가 남긴 원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진통은 우리 역사가 남긴 문제와 원한들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장재현 감독은 그런 문제들 중 하나로 대표 격으로 일제의 역사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인터뷰에서 밝히듯 이번 영화에는 일본을 공격하거나, <파묘>를 민족주의적인 창날로 삼으려는 의도가 없다고 한다. 단지 던지고 싶은 것은 죽은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 위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적절한 <파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두서없는 생각들-

영화에 한정 지었을 때 <파묘>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전문가물과 오컬트 장르가 결합된 부분이었다. 각자 전문 분야가 있어서 사건을 풀어나가는 부분이 오컬트 장르에서 진상과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부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고 할까? 대신 오컬트 장르에 기대하는 오싹함보다는 전문가물에서 볼 법한 쾌감에 기획이 치중되어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이 부분이 아마 이 영화를 접할 때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


작중에서 사무라이 오니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뜬금없다는 생각도 했지만, 해외 오컬트 관객을 생각하면 적절한 안배였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장르적 쾌감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이상 친일파 할아버지의 원령은 최종보스로는 약한 감이 있다. 아마 국내 관객들은 뜬금없다 생각했지만 추후에 해외극장이나 OTT에 상영될 걸 생각하면 '해외 관객들이 가장 흥미롭게 느낄만한 요소를 집어넣은 게 아닐까?' 한다. 그도 그럴께 우리도 좋아하잖아... 배드애스 한 신부님이 여러 문화권이 짬뽕되어 국적을 알 수 없는 악마와 벌이는 치열한 사투를. 조선 퇴마사와 일본 사무라이 원령의 사투가 조금 싱겁게 끝난 감도 있지만 이들이 전문 퇴마집단은 아니었으니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역사를 다루는 오컬트물에 전문가물이 결합되며 생긴 또 다른 시너지도 있다. 전문가는 일이 어떻게 꼬이고 흘러가던, 자신의 직업윤리와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다. 작중에서 상덕이 파묘 과정에서 발견한 비밀에 책임감을 다한 것은 그가 오랜 세대로서 느끼는 의무감도 있었겠지만, 다른 인물들과 같이 자신의 직업윤리를 다하려는 의무감이 컸을 것이다. 난 역사에 무책임했던 이들 대신, 전문가로서 직업윤리를 다하는 그들의 의지는 우리가 이어가야 할 문제들에 대해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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