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언제나 기술보다 먼저다
이 광고 '감성' 있나요?
모바일 기기로 애플을 고집하는 이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여러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가장 많이 들었던 답변은 '감성 있잖아'였다.
그들이 말하는 '감성'이 무엇인지 그들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하진 못했다. 하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추구해 온 혁신과 유행을 선도하는 디자인, 그리고 무엇보다 애플은 지난 광고에서 기술자체보다 기술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지 이야기해 왔다. 그런 총체적인 노력이 지금의 애플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애플이 최근 신형 아이패드 프로를 공개하며 론칭한 한 광고 'Crush'는 강도 높은 비난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광고는 인간의 창의력을 상징하는 악기, 게임, 카메라, 페인트 등 물건이 압축기로 짜부되 신형 아이패드로 탄생하는 과정을 묘사했다. 아이패드 하나만으로 다양한 영역을 소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께 역시 얇다는 걸 강렬하게 어필한다는 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와닿는 광고였고, 애플의 CEO 팀쿡도 X(트위터)에 자랑스럽게 광고를 포스팅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론은 좋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게 이 광고는 나쁜 의미로 너무 과격했다. 애플의 코어팬덤엔 항상 크리에이터들이 있었다. 크리에이터가 코어팬덤으로 활약했기에 창작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애플을 '감성 있다'며 주저 없이 선택했다. 그 크리에이터들이 지금은 AI의 급격한 발전이란 크나큰 위협과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 광고는 크리에이터들의 도구를 모두 파괴하며, 마치 아이패드와 AI하나면 이 모든 일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크리에이터들은 기능이 압축되며 만들어지는 아이패드에서 AI라는 거대한 압력에 스러져 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엿보지 않았을까?
배우 휴그랜트는 '실리콘밸리가 인간 경험의 파괴를 선사했다'며 비난했고 블룸버그의 한 기사는 '애플의 아이패드 광고가 심연 속 AI 공포를 불러일으키다'며 타이틀을 내걸고 광고가 AI 포비아를 느끼게 한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에 애플은 이례적으로 "이번 영상은 과녁을 빗나갔고 이에 유감을 느낀다"며 사과하고 해당 광고를 TV에 내보내지 않겠다고 밝혔다. 무려 광고가 송출된 지 이틀 만에 벌여진 일이다.
감성을 지닌 기술은 마케팅의 영역이지만...
'사람을 위한 기술' 같은 말은 제품을 팔기 위한 겉멋 든 말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속 빈 껍질에 불과했다면 사람들은 결코 애플에 지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이번 광고와 애플의 옛 광고 '1984'를 비교하며 아쉬운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
우리가 AI에게 보내는 시선은 당시 사람들이 컴퓨터에 대해 보내는 시선과 닮아 있다. 기술은 점점 나아지는 데, 사람이 자리매김할 수 있는 장소는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다. IBM 같은 거대 기업만이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살아남을 것처럼 느껴지도 한다.
1984년 1월 24일, Apple은 Macintosh를 공개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왜 1984년이 1984가 되지 않을 것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광고 말미에 나온 카피
그런데 획일화되고 디스토피아가 된 세계를 한 여성이 망치를 들고 깨부순다. 애플은 컴퓨터로 인해 인간성이 소실되지 않음을 광고로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애플이 오히려 IBM의 자리에서 인간성을 외면하고 AI와 기계를 숭배하는 듯한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AI 산업이 떠오르면서 그 기능을 강조하거나, 생성형 AI를 제작에 활용한 크리에이티브를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깊은 울림을 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광고에서 보여주는 AI 기술이 우리의 삶과 너무나 괴리되어 있다. (그나마 주행 AI를 보여주는 자동차 광고들은 나은 편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 속도로 인해 오히려 피로감을 느끼며 아날로그와 레트로가 트렌드로 떠오르는 시기다. 광고에서도 'AI로 뭘 할 수 있는지' 보다 'AI가 대신하기에 인간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휴머니즘을 잃는다면, 우리는 상상하던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마주할 뿐이다.
-p.s-
1) 이번 애플의 광고는 틱톡이나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OSV(Oddly Satisfying Video: 묘하게 만족감을 주는 영상, 광고처럼 압착기로 짜부하거나 비누를 촘촘하게 자르거나, 모래를 흔드는 영상 등이 있다.) 장르를 활용한 것이지만 놀랍게도 LG가 15년 전에 비슷한 광고를 이미 만든 걸로 알려지면서 표절 의혹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 이 광고를 반대로 재생하는 영상이 화제가 되고 있다. 마치 거대한 압력을 꿋꿋이 이겨내는 모습 같아 오히려 애플이 지향해야 했던 방향이라는 댓글도 있다. 하지만 현업에서는 강조해야 될 AI의 성능과 신형 아이패드의 두께가 강조되지 않아 기획으로서 탈락했을 거라 생각한다. 광고에서 AI가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는 점을 전달하고, 시각적인 연출로 화제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느껴지지만, 지금껏 애플이 추구해 온 휴머니즘과 방향이 다른 기계적인 연출에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최근 삼성이 재빠르게 애플의 크러쉬 광고를 저격하는 광고를 송출해 업데이트 해봅니다.
노렸다는 듯이 크러쉬 광고에서 보였던 무대를 배경으로 배우가 부서진 기타를 주워들고 연주를 이어갑니다. 카피는 '창의력은 짜부 될 수 없다.(의역)'. 본래 애플이 전달해야 될 메시지를 삼성이 낚아챈 모습이 인상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