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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소라빵 Jun 13.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며 저질렀을 지도 모를 실수

악의 평범성에 주목했다면 놓쳤을 것들

영화가 시작하자 말자 커다랗게 울리는 정체불명의 소음에 귀를 막으며,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 울려 퍼지는 끔찍한 소리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며 생각했다.


청각과 시각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시각은 눈을 감는 것만으로 감각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 하지만 청각은 아무리 귓구멍을 막아도 완벽하게 차단하기 어렵다.


그 차이는 한쪽을 제한할 때 분명해진다. 시각만으론 소리를 상상하긴 어렵지만, 소리는 때로 시각을 제한할 때 더욱 생생한 감각을 전해 준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상상이 된달까?


 그래서 이 영화는 수용소의 끔찍함을 전혀 카메라에 담지 않는데도 이따금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총성, 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바로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무시해 온, 잔인한 사실에 대한 공포를...


*영화에 대한 직간접적인 스포일러와 주관적인 해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눈이 아니라 귀를 열게 하는 마스터피스


이 영화의 유일한 옥에 티를 꼽자면 홍보 포스터에 적힌 '당신을 눈 뜨게 할'이란 카피를 꼽고 싶다. 그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우선 이 영화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떠올린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명백하게 내 의견을 밝히자면, 루돌프 회스가 악인인지 아닌지에 초점을 맞추는 건 이 영화가 의도한 함정이라 생각한다.

영상만 볼 땐 정말 목가적인 유럽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천국과 같이 꾸며진 회스 가족의 정원은 '악의 평범성'이란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악의 평범성'은 독일 출신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실행범 중 하나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관찰한 뒤 남긴 책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마치 저 마지막 순간에 그가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무시무시한 교훈, 즉 말과 사고를 거부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의 내용을 일부 의역함.

아렌트가 재판 과정에서 지켜본 아이히만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가족을 챙기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법을 지키는 모범적인 시민이었다.(마치 영화 속 회스 가족처럼) 이런 아이히만의 모습에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만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기록을 남겼다. 아이히만의 천성이 악했던 게 아니라, 마치 국가의 톱니바퀴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사고하지 않은 사고의 거부가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다는 통찰이다. 하지만 아렌트가 관찰한 것처럼 아이히만은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을까?


아렌트의 저서를 비꼬아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한 베티아 스탕네트는 아렌트의 시대에선 접할 수 없었던 인터뷰 자료와 아이히만이 남긴 욕설과 모욕적인 언사가 넘쳐나는 글을 근거로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사형을 받지 않기 위해 가면을 썼을 뿐이며, 그 연기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아렌트는 속아 넘어갔다.'며 아렌트의 결론에 반박했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아이히만이 생각의 끈을 놓고 홀로코스트에 동조한 건 스탕네트의 의견대로 1. 그가 정말 타인을 제물삼아서라도 개인의 욕망과 지위를 추구하는 악인이어서 일 수도 있고, 아렌트가 통찰한 대로 2. 생각 없이 그런 가치를 따르도록 권장한 국가와 시대적 배경에 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을 믿든 수세기를 걸쳐 대립해 온 성선설과 성무선악설, 성악설의 반복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찰 카메라의 형식으로 아렌트와 스탕네트가 놓쳤을지도 모를 회스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가며 관객에게 그 판단을 맡긴다. 회스 가족의 비인간적인 면, 성실한 군인과 다정한 가장으로서의 모습, 단체로 어딘가 비틀린 나치의 모습 등 복합적인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렇게 카메라가 잡아주는 대로 '아이히만이 정말로 악인인가?'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관객은 영화가 의도한 대로 시각이 저지르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시각은 편협한 감각이다. 의도하든, 하지 않든 결국 누군가가 편집하고 각색한 부분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영화는 다른 감각을 강조한다. 바로 소리, 청각이다. 타인이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소리다. 시각이 캐치하지 못하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귀를 여는 것이다.


영화는 상영되는 내내 단란한 가족이 생활하는 아름다운 공간을 비추지만 시각으론 알 수 없는 정보가 소리로 흘러나온다. 기관총이 울리는 소리, 소각장에서 뭔가가 타는 소리, 군인들의 고함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래서 난 이 영화 홍보 포스터에 적힌 '당신을 눈 뜨게 할 잔혹한 마스터 피스'라는 카피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2. 벽을 넘나드는 무시하고 싶은 소리

회스 가족이 잔혹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린 것처럼, 카메라는 우리가 아는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현실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소리처럼 들려오는 수용소의 비명소리와 총성, 밤새 타오르는 소리는 벽을 넘어 두 세계를 넘나 든다.

영화 속 인물들이 이 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진다. 먼저 회스 부부. 이들은 잠자리 사이로 흘러드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다. 부부는 누구보다 아우슈비츠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챙기고자 아우슈비츠 소장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인간성을 노이즈 캔슬링 한다.

두 번째는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동정하지만 소극적으로 회피하는 사람들. ('악의 평범성'에 해당하는 인물들은 오히려 이쪽일지도 모르겠다.) 회스 가족의 자녀들이나 초대를 받고 찾아온 시어머니가 여기에 해당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애써 모르는 척하지만 때론 동정의 눈빛을 보내고, 시어머니는 밤새 잠자리를 괴롭히는 비명소리에 못 이겨 편지만 남기고 친정으로 돌아가버렸다.


회스 부부는 이들의 감각을 왜곡하기 위해 벽을 치고 정원을 꽃과 나무로 아름답게 꾸몄지만 아직까진 부부처럼 양심을 노이즈 캔슬링 해버리는 단계엔 이르진 않았다. 하지만 이들도 성장하며 부모와 시대가 권장한 대로 약자들이 내는 신음소리를 노이즈 캔슬링 해버릴지도 모른다. 실제로 좀 더 나이를 먹은 큰 아들은 작은 아들에 비해 소리에 둔감한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고통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하거나 고통에 공명한 이들이다. 예를 들어 폴란드 소녀는 야음을 틈타 수용소의 노역장에 재소자들이 먹을 사과를 몰래 숨겨놓는다. 그리고 아직 사회의 때가 묻지 않는 아기는 수용소의 잔혹한 현실을 소리로 감지하며 순수한 공포를 느낀다.


이처럼 가족의 안락하고 아름다운 생활 뒤에 가려진 수용소의 지옥 같은 현실과 다양한 군상의 반응은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달라질 수 있는지 '시각'과 '청각'이라는 매체를 통해 관객에게 생생하게 고찰하게 한다.


3.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기억하지만...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기억한다. 역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며 업보를 청산하고자 노력한 이들 덕분이다.


그래서 아무리 카메라가 화목하고 단란한 소장 가족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현혹되지 않고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고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선 어떠한가? 


우리는 영화에서 소개된 회스 가족의 일원들 중 어느 쪽인가? 회스 부부처럼 악의 평범성을 변명으로 삼아, 혹은 변명으로 조차 사용하지 않은 채 개인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부류인가? 아니면 벽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를 알아챘지만 애써 무시하거나 시대에 순응하는 쪽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사과라도 벽 너머에 전달하고자 노력하는 숭고한 이들인가?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본부에서 아우슈비츠의 소장 자리를 보전받은 뒤, 루돌프 회스가 층층이 이어진 긴 계단을 내려가다 갑자기 헛구역질을 시작한다. 갑자기 화면이 전환된 뒤 카메라는 현대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비춘다. 대사 없이 박물관 직원들이 청소기 돌리는 소리만 시끄럽게 영화관을 가득 메우며 희생자들이 남긴 수많은 증거와 유산들이 카메라에 담긴다. 아픈 역사는 이제 희석되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1940년대로 돌아가 루돌프 회스를 잡는다. 회스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 뒤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는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상업 영화치고는 정말 메시지가 뚜렷한 장면이다.

1944년, 졸라휘테에서 루돌프 회스_출처: 위키피디아

아우슈비츠에서의 일은 회스가 어둠밖에 남지 않은 계단을 내려간 것처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하듯, 시대가 악행의 증인이 되었다. 회스가 마지막에 헛구역질을 하며 주변을 둘러본 것도 그런 미래를 그가 내다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세계는 어떠한가?


영화에선 벽이라는 메타포로 은유되었지만, 우리도 회스 부부가 정원을 가꾸고 벽으로 둘러친 것처럼 보고 싶은 것에만 초점을 맞춘 채 들려오는 소리에는 귀를 막고 노이즈 캔슬링 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 혼자만의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감독이 오히려 수상 소감에서 명백히 밝혀줬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이 의도하는 바는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엔딩 크레디트의 그 소음.


마치 감독이 '아우슈비츠는 지나갔지만, 당신은 지금 현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 같았다.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전체의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에서 자행 중인 공격으로 인한 희생자든 모두 비인간화의 희생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 클로시치크

영화에서 만큼이나 실제도 빛나던 소녀의 삶과 저항 정신에 이 상을 바칩니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를 수여한 이후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남긴 말(의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집중하느라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놓치곤 한다. 끔찍한 죄를 돌아보고 상기하는 일만큼 귀를 여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정말 악의 평범성에 물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아니만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 클로시치크'는 영화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을 위해 사과를 숨겨놓던 폴란드 소녀의 실제 역사 속 이름이다. 열화상 카메라로 찍어 온 배경이 어두운 가운데 그 소녀와 사과만 새하얀 하얀색으로 연출되었다. 어두운 시대에 그 자그마한 빛이 얼마나 내일을 밝힐지는 모르지만,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그 작은 빛이 누군가를 인도하는 빵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루돌프 회스는 영화에서 자신이 사람을 가마에 넣어 태우는 일을 하고 있는 데도 태연하게 그 이야기를 자녀에게 읽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제 몫을 희생해서라도 우리가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있었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유대인이다.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내내 감독의 손은 숨길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의 용기에 응원을 보내며 영화 전체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본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가 지르는 비명과 소음에 귀를 열고 제대로 듣고 있는 가?


-p.s-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중에서

1. 영화를 보며 같은 시대를 소재로 다룬 '인생은 아름다워'가 많이 떠올랐다.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역사와 현실을 보여주는 게 좋을지 망설이게 된다. 영화로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완성도는 높다고 생각하지만 영화가 주는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2. 웬일로 영화의 시놉시스도 보지 않고 예매를 해버리는 바람에 관람 전에 팝콘을 가득 샀다. 곧 후회하게 되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속이 메슥거려 뭔가를 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혹시 뒤늦게 관람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 영화만큼은 팝콘을 피하는 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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