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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빈 May 24. 2024

이직 아닌 전직 3회차

여전히 나의 재능을 모르겠어요

  1991년 10월 태어나 돌잡이로 연필을 쥔 나는 의외로 공부머리보다는 손재주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초등학생 시절에는 도예가가, 중학생 때는 요리사가, 고등학생에 올라오면서 푸드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그런 나의 첫 직업은 사회복지사였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참으로 이상했다.


 그러다 1년 정도 일을 하다 그만두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신천에 고시원을 잡고, 방송작가 아카데미를 등록했다. 작가도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꿈이었다. 계기는 단순히 초등학생 때 학예발표회를 위한 동시를 쓰고 캔버스에 걸었는데 장학사이신 작은 엄마가 '시 잘 쓰네~ 작가 해도 되겠다'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등학생때 동아리는 붓글씨로 시를 짓는 문예동아리였고, 한창 라디오를 좋아하고 작가를 하고 싶다는 선배의 영향으로 막연히 나도 작가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손재주가 좋아 여러가지 여흥거리를 만들던 나는 또 막상 백일장에 나가면 덜컥 상을 타왔기 때문이다. 시 동아리였지만 산문 등도 쓸 수 있었고, 덕분에 내 인생 최다 수상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내가 남들보다 글쓰는데 재능이 있구나, 나도 작가를 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내심 했다. 물론 막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나의 첫 직장은 실버타운이 됐다.


 대학과 연결된 한 실버타운으로 면접을 봤고, 나름 대기업 계열사였기 때문에 의심없이 지원했던 것 같다. 사실 이때 편입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경험삼아 면접이나 봐보자라는 마인드였고 덜컥 합격했다. 그 당시 대학은 대전, 실버타운은 수원이었기 때문에 기숙사를 제공해준다는 말에 갈까 말까 참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러다 그냥 돈이나 벌자 싶은 생각에 입사를 했고 21살에 첫직장을 가졌다. 


 사회복지사로 취업한 줄 알았으나 딱히 그런건 아니었고 실버타운에 거주하는 노인들이 와서 먹는 레스토랑 같은 식당에서 응대하는 역할이었다. 힘도 많이 써야하고 잡일도 많이 해야했고, 상태가 안좋은 노인을 보면 바로 보고를 해야했다. 하물며 5가지의 시간표대로 계속 굴러야하기 때문에 체력도 멘탈도 좋아야 했다. 당시에는 월급도 많이 들어왔고, 기숙사도 레미안 아파트 50평대에 단독 방인데다가 할 일이 없어 매일 퇴근 후 직원들끼리 술 한잔 마시는게 일과였다. 나쁘지 않아서 나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데 1년을 버티고 퇴사를 했다.


 그때는 계약직으로 1년을 다니면 정규직을 전환해줬다. 그래서 재계약을 하려던 당시 고민을 많이 했고, 결국 싸인을 하지 않은 채 그만뒀다. 아마 그 당시 여기서 젊음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과 내가 진정 좋아하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대기업 정규직을 내려놓았다. 


 이런 고민을 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는 대학 2학년 시절 실습을 홈리스지원센터에서 했는데 이때 복지 사각지대 중의 사각지대인 홈리스 지원을 보고 충격을 받아 꼭 졸업 후 여기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 당시 담당 선생님께서는 어린 여자가 일을 하기엔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를 했었는데 때마침 직장을 그만두기 전에 연락이 와서 티오가 났으니 지원을 해볼테냐 하셨다. 또 하나는 당시 작가가 되고 싶어서 작가를 양성하는 기관에 면접을 보러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한 양성기관에서는 내가 다니는 직장을 보고 '대기업인데 나라면 그냥 거기서 있겠다' 하면서 비아냥 거려서 굉장히 기분이 나쁜 적이 있다.


 어찌어찌해서 직장은 그만두고, 이불만 싸서 서울로 직행. 방송작가 아카데미가 있는 신천에 고시텔을 구했다. 이때 짐을 옮기다가 엄마한테 일을 그만둔 것을 걸려서 아직도 욕을 먹고 있다. 당신의 딸이 대기업 직원이 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버리고 불안정한 직업을 갖는 것이 싫으셨을거다. 하지만 나는 안해서 후회하든 해서 후회하든 경험을 쌓고 후회하자는 마음이었고, '10년만 기다려, 부자가 될게'라는 포부를 밝히며 전직을 준비했다.


 운이 좋게도 아카데미를 다닌지 2개월만에 방송작가로 취업이 되었고, 첫번째 전직을 하게 되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방송작가 6년차에 포기했다. 일이 재미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더이상 올라갈,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근근히 입에 풀칠하는 정도로 살았기 때문이다. 처음 작가 일을 할때 받은 급여가 118만원이었다. 6년 뒤에는 150이 되었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나로서는 버티지 못하는 금액이었고, 월세를 내야했기 때문에 식비를 아끼자는 생각에 영양실조까지 왔다. 집에는 이렇게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많아 차라리 그때 지원을 받거나 고향으로 내려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내 고향에서는 그런 일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서울살이를 고집했다. 방송 일을 그만 뒀지만 틈틈이 들어오는 알바로 근근히 먹고 살았고, 두번째 전직으로 광고홍보 분야에 입성했다. 몸은 편하고 셈솟는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것에 재미는 있었지만 임금체불을 두번이나 당해서 소송을 하느라 바빴던 것 같다. 


  세번째이자 지금의 직업은 마케터다. 비슷한 결대로 직업이 바뀌고 있지만 확실히 분야별로 해야하는 일이 다르다는게 참 신기하고 재밌다. 당장에 결과가 나오는 것도 흥미롭고, 시간을 들여서 결과가 나오는 것도 신기하다. 물론 고자본 고효율이라는 법칙은 깰 수 없지만 어떻게 하면 가성비있게 마케팅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다. 아마 이 직업 역시 평생 직업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한 직장에서 7년째 다니고 있는거라고 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청주에서 나고자라 대학은 대전으로, 첫직장은 수원으로, 서울살이 14년차

아직도 나는 나에게 알맞은 직업이, 직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그냥 하고싶은데 적당히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을 찾은 것 같고, 어영부영 맞아 떨어져서 길게 일을 했던 것 같다. 대학생 혹은 고등학생 때 알바라도 해보고 경험을 쌓을걸이라는 후회가 들기는 하지만 그때 못한 만큼 지금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적은 나이는 아닐지언정 그렇다고 많은 나이도 아닌 지금을 잘 보낸다면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삶 또는 인생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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