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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빈 Jun 27. 2024

기생독립단을 찾아내다

한국 최초의 여기자의 회고록

한국 최초의 여기자 故 최은희 기자의 회고록에는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해주기생들과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1919년 4월, 

경기여고 졸업반이던 최은희는 만세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로 해주감옥에 투옥되었고

시위 후 체포된 기생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감생활을 했던 것이다.


故 최은희 기자의 딸인 이달순 전 수원대 총장은 어머니가 들려준 당시의 상황을 기억한다.



: <故 최은희 기자 회고록>

해주에서 만세운동을 불렀던 기생들 중에 주모자들이 많이 잡혀왔는데 

그 감옥에서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또 화상을 입었는지...


가죽채찍으로 때려서 몸에 금이 간 것이 부어올라가지고 

구렁이가 몸을 감고 올라간 것처럼 그렇게 보일정도로 비참했다.. 



또한 故 최은희 기자가 작성한 <개화여성열전>에서는 또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


: 기생들의 만세를 주동했던 김월희와 문월선의 경우

취조과정에서 만세운동 전에 해주도립 자혜병원 간호부 김온순을 만나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50원씩 헌금을 한 일도 발각되었다


만세시위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까지 댄 기생들은 

일제의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고문을 겪으며 대한의 독립을 염원했다.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서대문형무소 개소한지 10여 년 만에 수감인원이 무려 6배나 늘었고 성인 남자 한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공간에 7명에서 9명 정도가 수감 될 정도였다.


그리고, 기생들에게는 모진 고문보다 더한 잔혹한 행위들이 이어졌다.


13살 밖에 안된 어린 소녀와 부녀자들..
그리고 여학생들 조차도 육체적 고통과 괴로움뿐만 아니라
차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치욕스런.. 

특히 여성에 대해서는 성 도착적인 잔학성까지 보였다. 

                                                <미국 상원 맥코멕에 의해 제출된 장로교회 보고서, 1919.7.17>



당시 일제의 고문 방법은 70가지가 넘었고 세계 고문역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일들이 자행되었다.


- 코에 뜨거운 물을 붓고 거꾸로 세우거나 뒹굴게 하는 방법

- 입을 벌리게 하고 막대기로 선탁가루를 쑤셔넣어 기절시키는 방법


시위현장에서 조차도 여성들이 만세를 부르면 옷을 찢어버리고 가슴을 드러낸 채 밟아버리거나 경찰서에 끌고 가서는 남성들이 보는 앞에서 치마를 벗기고 발길로 구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문이 자행된 곳은 더욱 밀폐된 감옥.

당시 낮게 평가된 기생의 경우.. 더욱 심한 처사를 당했을 것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유래없는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면서까지 배후를 캐내려고 했지만 독립을 외친 기생들에게는 배후가 없었다. 그저 나라를 되찾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뿐. 아무리 잡아들여도 독립운동의 물결은  들불처럼 번졌고, 그 역사의 중심에 서있던 기생들도 죽음을 불사한 독립투사로 당당히 서 있었던 것이다.




1919.03.29 수원예기조합 소속 기생의 만세


1919년 3월 29일, 수원


총칼로 무장한 일본경찰 앞에서 당당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이들이 있었다. 소복을 차려입은 삽시여 명의 기생이었다. 이들은 수원예기조합 소속의 기생으로 당시 나이 열다섯, 열여섯밖에 되지 않았다.


젖살도 빠지지 않은 앳된 모습의 기생까지도 죽음을 불사하고 태극기를 들었다.


당시 대한의 독립을 외친다는 것 자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전재가 깔려 있는 행위로 총칼을 든 일본경찰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남은건 모지고 끔찍한 고문이었음을 누구나 알고 있는 시대였다.


각오와 결사는

33인의 민족대표뿐만 아니라 

30인의 기생도 가지고 있었다.


실제 1919년 3월 31자 간행된 매일신보에서는 해당 사건에 대한 보도를 다뤘다.


이십구일 오전 십일시 반경에 수원조합 기생일동이
자혜병원에 검사를 받기위하여 들어갔다가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몰려 병원 안으로 들어가 뜰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서 앞으로도 나왔다가 해산했는데

조합원 중에
김향화는
경찰서로 인치 취조하는 중이더라.

                                                                                               < 매일신보, 1919.03.31>


기생들의 독립시위를 본 주변 상인과 노동자들은 모두 무리지어 달려 나왔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섰던 스물세살'김향화'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일본경찰은 조선노동자들의 게릴라 시위라고 생각을 했겠지만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기폭제가 되어 당일 수원전역에는 대대적인 항의시위가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일제를 긴장시켰다. 수원지역의 모든 기생이 움직인 사건, 일제첩보원이 실제 작성하여 총독부에 보고한 <조선소요사건 보고서>에서도 기생들이 만세를 불렀다, 가 아닌 기생독립단이 나타났다! 라고 기록했다.


29일에 이르러 기생 약 30명이
자혜의원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밤에는 상인, 노동자 및 무뢰한 등이
시내 각소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내지인 (일본인) 상점에 투서하고 창문을 파괴하는 등
폭행이 심해져 수원경찰서원과 보병 및
소방조원이 협력하여 경계중이다.

                                                                                                  <조선소요사건 보고서>


1919년 3월 29일 기생 김향화는 시위주동자로서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다만 5개월 뒤, 가출옥했다. 한달 일찍 출옥한 것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상황은 전혀 반대였다. 그 당시 선고받은 날보다 더 빨리 출옥한다는 것은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형을 마치기 전, 무슨 일이 일어나기 이라는 뜻이다. 알 수 있듯이 가출옥한 뒤 그녀의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스무세살의 김향화는 승무에 능하고 가야금을 잘 뜯는 일등 기생이었다. 그리고 2009년 수원시의 건의로 김향화는 독립유공자로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지만 훈장을 받아갈 후손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우리는 기생, 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가?


단순히 남성의 옆에서 술잔을 따르고 

춤을 추고, 가야금을 뜯으며 흥을 돋구는 역할을 한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기생의 이야기는 이제껏 그다지 주목받아온 주제는 아니다.

이름없이 사라진 수많은 기생들의 이야기를 독립운동사에서 볼 수 있었던가?


기생들의 독립운동은 격렬했고, 뜨겁다.




기생들의 집단시위, 기생조합만세운동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터


유관순 열사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그 날. 황해도 해주에서도 거사가 계획되고 있었다. 기생조합장 문월선을 비롯한 해주기생 8명이 결사대를 조직, 남성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립투사가 되자고 언약했다.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의 기미독립선언서를 구할 수 있는 경우가 없어 기생들 스스로 손가락을 깨물어 태극기를 완성하고 독립선언서를 써내려갔다.


실 물이 모여 대하를 이루고, 티끌 모아 태산도 이룩한다 하거든, 
우리 민족이 저마다 죽기 한하고 마음에 소원하는 독립을 외치면
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로 집중될 것이요.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우리 한국은 세계 강대국들의 동정을 얻어
민족자결문제가 해결되고 말 것이다.

                                                                   <해주기생들이 국문으로 작성한 독립선언서>



활판소에 맡겨 5천장을 찍어낸 독립선언서는 옥양목 치마저고리에 흰머리때로 치마를 졸라매고 머리엔 태극수건, 나무깃대에 꽂은 태극기를 든 8명의 기생들로 하여금 거리에 뿌려졌다. 종로에서부터 남문으로, 남문에서 동문으로 만세를 부르며 다니니 이들 뒤로 해주 시민들이 모여 큰 무리가 되었다.


총 인파 3천여 명, 다함께 만세를 불렀고 일본경찰은 선두에 선 8명의 기생을 모두 체포했다. 체포당하는 순간에도 대한독립만세는 멈추지 않았다.




오늘 해주기생 일동이 해주 종로에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남문에서 동문을 경유하여 서문으로 시위행진을 하였는데, 

해중월, 벽도, 월희,  향희, 월선, 화용, 금희, 채주 등이
다른 남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천여명 군중이 모여서 대한민국기를 들고 독립만세 부르며 
해주기생 대소동을 일으켜 검거됨. 공소제기 하였다. 


                                                                                                <1919.4.5 매일신보>




지난 4월 1일 해주독립만세운동.. 
기생 김월희 외 4명에게  다음과 같이 언도 

징역 6월
김월희 / 문월선 

징역 4월
이벽도 / 문향희 / 해중월 

                                                                                              <1919.7.1 매일신보>



모진  고문을 당하며 배후를 대라던 일본경찰에게 해주기생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일본기생과 다르다. 내 나라를 사랑할 줄 아는 한 사람, 한 여자란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생들의 조직적인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에 퍼저나갔다.



3월 19일, 진주

기생 32명이 선두에 서 자신들은 논개의 후손임을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고, 걸인까지 합류해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당시 기생이 만세를 불렀다는게 일제를 놀라게 했던 사건이었고, 일반 국민 역시 관심을 보이던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신문에서도 대대적인 보도를 하였다.


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 

십구일은 진주기생의 한떼가 구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여섯명의 검속으로 해산되었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있다더라..

                                                                                                    <1919.3.25 매일신보>



3월 29일, 수원

일등기생 김향화를 필두로 기생 30여 명이 일본 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


3월 31일, 안성

기생 변매화를 중심으로 또 한번 격렬한 시위가..


3월 31일 오후 안성조합 기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시작하자
안성 각 처에서 군중 천여명이 같이 태극기를 일제히 흔들고 

군청과 경찰서, 면사무소에 들어가 태극기를 꽂고
산이 진동하도록 만세를 부른 뒤 안성부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만세를 부르다가

저녁에 다시 만세를 시작하여 안성군중 약 3천명이 등에 불을 켜들고
만세를 부르니 면장 민영선씨가 보통학교로 집합케하였다. 

                                                                                                    <1919.4.3 매일신보(안성분국통신)>


4월 2일, 통영

기생들이 이끈 기록적인 규모의 만세시위


이소선, 정막래

두 명의 기생은 자신의 금반지와 비녀를 저당잡혀 광목 4필 반을 구입해 소복을 만들어 동료들과 나눠 입었다. 당시 나이 이소선 20세, 정막래 21세. 오전 10시부터 준비해 오후 3시경 시위를 진행하였다. 3천 여 명의 시민이 둘의 뒤를 따랐고, 통영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당시에도 가장 혜택받지 못하고 어떠한 보호조차 받지 못했던 기생계층이 나서서 국민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에 가정 먼저 목숨을 내걸었다.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천대받는 기생이 앞장서는데, 일반 국민들은 숨어있을 것이냐는 뜻을 품은 선두투쟁이었다.


<이소선, 정막래의 판결문>

정씨와 이씨는 1919년 4월 2일 오전 10시께.. 
경남 통영군 통영면 기생조합소에서 다른 기생 5명을 불러모아 
만세운동을 참여할 것을 권유. <기생단>을 조직했다. 

같은 날 오후 3시 3분께. 통영 군내 시장으로 향했다. 
7명을 선두로 33명의 기생이 뒤를 따랐고 통영경찰서 앞에서
약 3천여명의 군중이 합세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 피고 두명은 경찰관의 제지에 따르지 않고
선두에서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치안을 방해하였다.. 

(판사는 판결문에서 기생단 7명이 열광적인 기세로 군중의 최선두에 서서 
만세를 외쳤다는 경찰의 보고서와 진술 등을 언급했다) 


식민지 통치를 받던 시절, 일상을 살아도 무시무시한 폭력 속에서 움츠러들었다. 이런 와중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간다면 총칼을 든 헌병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시위에 앞장선다는 것은 주동자를 뜻한다.

가장 먼저 죽을 수 있는 위치기도 하다.


이를 알고도 앞에 섰던 기생의 마음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을까.


 통영기생과 조선총독부 판사의 대화  

기생 : 나는 여성으로서 본부(本夫)와 간부(姦夫)가 있는데
어느 남편을 받들어 섬겨야 여자의 도리에 합당하겠습니까? 

판사 : 물론 본부를 섬겨야지

기생 :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여자가 본부를 찾아 섬기려는 것이오.  

 이 같은 대답에 판사는 답변을 못하고 곧 퇴정하였다 한다

                                                                                                                   <통영사지>

                    




이전에 3.1절 특집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그 기록을 찾아내어 간략히 적어본다. 그때가 17년도인가 그랬는데 생존한 기생을 찾으라는 말에 머리를 쥐어짰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비록 하루 20분의 쪽잠을 자고 일을 했지만 결과물은 만족스럽다.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 벌어진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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