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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아샘 Aug 12. 2023

사람과 사람 사이

바운더리

 친한 친구가 사람 사이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얘길 들려줬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첫 만남 때부터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았단다.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자신을 잘 챙겨주고, 배려해 주는 모습도 참 좋고. 그래서 쉽게 마음을 주었고, 매일 연락하고 또 이틀에 한 번꼴로 만나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일들을 공유하고, 희로애락을 나누며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자주 만나면서 지켜보니, 그 사람의 모습이 처음 생각했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상대에게 서운한 마음을 표현해도, 기계처럼 차가운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결국 둘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었고, 친구는 마음을 많이 준 만큼 상처를 입게 되었다. 나는 친구의 행동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진득하게 알아가지 그랬어. 금세 마음을 주었다가 괜히 상처만 더 받았잖아.”


 나는 방어적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는 데 익숙하다. 상대방에게 마음을 잘 주지 않기에, 깊이 있는 관계가 되어서 상처받을 일도 적다. 사람들과 명확하게 거리를 두게 된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한 가지 이유는 오래전에 배웠던 바운더리라는 개념 때문이다.


바운더리는 나와 타인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인 경계를 말한다. 각자의 바운더리, 즉 경계를 열고 서로에게 다가가면 서로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 나와 타인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세웠다. 새로운 사람과 만날 때마다, 상대가 지나치게 다가와서 내 바운더리가 침해받진 않는지 따져보았다. 상대가 내 바운더리에 불쑥 들어오면, 불편한 티를 내거나 내가 그만큼 뒤로 물러나서 나만의 경계를 유지했다.


그렇게 거리를 두면서, 심리적으로 너무 가까워져서 겪게 될 어려움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견고한 바운더리를 지켜나가면서, 나를 지킨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종종 외로웠고 고립되는 기분이 들어서 씁쓸하기도 했다. 그래도 관계로 인해서 상처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꾸준히 내 방식을 유지했다.


 ‘친구가 나처럼 스스로 바운더리를 견고하게 잘 세웠다면, 상처받지 않았을 텐데.’


 친구가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가,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상대에게 쉽게 다가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운더리를 세우지 못한 채 상처를 입은 친구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바운더리를 잘 못 세워서, 안타까운 사람이 친구뿐일까. 문득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견고한 벽만 세우고 있는 나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바운더리에 대해서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바운더리에 관해서 더 알아보았다.


 바운더리에는 건강한 바운더리와 건강하지 못한 바운더리가 있다. 먼저 친구의 경우처럼 너와 나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계가 불분명한 바운더리는 건강하지 못하다. 바운더리가 희미하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나처럼 너와 나의 구분이 극도로 강한 경직된 바운더리는 건강한 걸까. 그렇지 않다. 바운더리가 경직되면 주변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결국 바운더리를 희미하게 두어서 누구든지 조건 없이 들어오게 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견고한 바운더리를 두어서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거리를 두는 것 모두 건강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바운더리를 세워야, 상처도 덜 입으면서 다른 사람과 원활하게 교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주변을 살펴보면, 학생들이나 동료 교사들과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교사들이 있다. 서로 장난도 치고, 농담도 주고받는다. 그런 동료들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교사와 학생이 친구처럼 지내다니, 교사와 학생 사이는 사제 간이니 거리가 있어야지. 또, 동료 교사랑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도 문제야. 동료들과 너무 허물없이 지내다 보면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해서, 문제가 될 수 있다니까.’


 수업 시간에 나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내가 학생들과 경계를 잘 세우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지만, 쉬는 시간에도 좀처럼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아쉽고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그렇다고 쉬는 시간에 마음을 놓고 아이들을 대하면, 공적인 수업 시간에도 나에게 함부로 대할까 봐 선뜻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또한, 동료들과도 거리를 두기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 않아서 좋았지만, 나를 사무적으로만 대하는 탓에 불편할 때도 있었다. 또한, 학교에서 마음을 털어놓을 곳도, 어려움을 공유할 곳도 없어서 외롭기도 했다.


그동안은 극단적으로 불분명한 바운더리와 지나치게 명확한 바운더리만 생각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바운더리를 활짝 열었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닫으면서 유연하게 생활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공적으로 아이들과 경계를 세우고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편하게 다가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은 경계를 풀고 아이들에게 또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언제까지나 견고한 성처럼 경계를 세우고 있으면 상처는 덜 받을지 몰라도, 아이들과 또 주변 동료들과 깊이 마음을 주고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참 많은데, 그 시간 속에서는 사무적으로만 지낸다면 슬플 것 같다. 자신만의 벽 안에 갇혀서 아이들의 예쁜 미소를, 또 주변 동료들의 배려와 따뜻한 마음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제쯤 관계에 능통할 수 있을까. 퇴직을 앞둔 시점이 되면, 아이들 앞에서도, 또 동료들 앞에서도 문제없이 살 수 있을까. 부족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지금 한 걸음 더 용기를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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