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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 May 02. 2024

행복으로만 세상을 살려고 하니까..

그림자를 볼 줄 모르는 아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교수님은 페인팅 수업 첫날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림자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해." 그림을 그릴 때 내가 어두운 부분이 없는 것처럼 빼놓고 그린다는 뜻이었다. 그림자를 볼 줄 알아야 사실화가 완성된다. 그림자 없는 장면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사자같이 생겼던 그 교수님의 말을 들었을 때 정곡을 찔렸다. 나는 그림자를 볼 줄 모르는 아이. 약점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12년이 흘렀는데 이걸 아직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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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도를 다녀왔다. 인도에서 경험한 모든 것이 좋았다. 같이 간 친구만 빼고. 친구는 나와 다르게 어둠을 잘 보는 아이였다. 어쩌면 너무 많이 보았다. 나는 모든 것이 즐겁고 매 순간이 행복한데, 그 친구는 불편함과 불쾌함이 잠자리 날갯짓처럼 쉽게 찾아오는 듯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내가 어둠을 볼 줄 알았다면 충분히 공감해 줬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스치는 모든 것이 그 친구를 불쾌하게 만드는 듯했다. 8시간이나 날아와서 부정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친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사 밝고 긍정적인 나의 태도는 친구를 지치게 했다. 같이 힘듦을 표현해 주길 바랐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친구의 부정적인 태도에 나도 온몸에 긴장을 한 듯 어려운 여행을 했다. 인도의 모든 것이 좋았는데. 나쁜 점 까지도, 소중한 경험이니까. 그럼에도 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갑자기 체한 듯 온몸이 불편했다. 생각해 보면 밥을 먹은 지 다섯 시간이나 지난 뒤였는데 그게 왜 체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서 드디어 편안한 침대에 누워 긴장을 내려놓고 잠에 드는데 아침이면 비명을 지르며 깼다. 심장마비가 올 것 같이 심장과 갈비뼈가 아팠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체한 것으로 죽을 수도 있는지 검색해보기도 했다.


아빠는 나의 여행 이야기와 증상을 듣더니 왜 아픈지 알 것 같다며 약을 지어오셨다. 약을 먹으니 바로 다음날부터 숨쉬기도 편해지고 심장이 아픈 것도 거의 다 없어졌다. 너무 신기해서 아빠에게 무슨 약이었냐고 물으니 긴장을 풀어주는 신경정신과 약, 즉, 공황장애에 쓰는 약을 약간 넣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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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친구가 괘씸했다. 정신건강만큼은 타고났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공황장애 약을 먹게 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줬단 말이야? 그런데 참 신기했다. 한국에 와서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안도감, 해방감이었다. 예민했던 그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긴장되었던 것이 끝나니 행복했다. 그 순간 내 감정을 적어보라고 한다면 부정적인 감정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정신과 몸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이 구식이라는 것은 나에게 새로운 지식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몸으로 경험하니 참 신기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인도에서 친구 때문에 긴장했고 의견차이 때문에 어려웠던 것은 있었지만 분노, 슬픔, 짜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참을' 것도 없었는데 어떤 것이 쌓였다가 터진 것일까.

희한한 것은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을 알아채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마주할 용기가 없는 감정으로 만들어져 있다. 분노와 슬픔이 찾아오는데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만족스러운 감정 상태, 편안하고 행복한, 긍정적인 상태를 흔들게 하는 감정을 거부하려는 방어기제와 같다. 망각이 최고의 선물이라고 하지만 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으니, 마주하기 두려워 덮어놓은 저 부정적인 감정들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욕심 많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사랑하는 가족이라서, 쿨 해 보이고 싶어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분노, 슬픔, 질투심 같은 것들을 멀쩡히 느끼지 못한다. 씁쓸하더라도 마주해야 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무시해 버린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들도 긍정적인 감정만큼이나 고집이 세기 때문에 그냥 "망각되어" 사라져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인식해 달라고 여러 번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으면 감정은 몸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신체적 증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감정을 인식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이 증상들은 내가 느낀 것처럼 꽤 강렬해서, 그 통증이 감정이 인식해 달라고 난리 치는 것이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차라리 늦은 밤 침대에서 하는 생각이나 이해, 통찰 정도로 느껴버릴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지력으로 부정적 감정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 감정은 몸의 질병을 만든다. 문제는 이런 통증이 찾아오고 나서도 나처럼 "이게 체한 것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있는 부모님이 없었다면 나도 병원을 갔겠지. 의사는 정성껏 나를 진찰했을 것이고, 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은 채 내 신체적 증상만 보고 소화제를 처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부정적인 감정을 마주하는 일이 아무리 괴로워도 심장마비인 줄 알았던, 당장 죽을 것 같았던 나의 증상만 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기 전 하루를 되돌아보며 일기를 쓰는 것,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적당한 뒷담화는 얼마나 쓸모 있는 사회적 현상인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 소리를 지르는 것. 감정이 신체적 증상으로 오기 전에 느껴질 수 있도록 우리는 이런 과정으로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몸으로 증상이 왔다면? 그때는 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된다. 아픈 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어떤 것 때문에 지친 건지 묻는다. 생각보다 몸은 명확하게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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