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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 Sep 04. 2021

군필은 누구나 꼰대다

넷플릭스 드라마 D.P에서 떠올린 군대

2014년 2월 11일. 몸에 새긴 문신처럼 여전히 선명한 내 입대날이다. 뭐 좋은 날이라고 아직도 기억하는지 르겠지만, 주민번호라도 되는 양 잘 잊히지 않는다. 아무튼 갑자기 케케묵은 군대 입대날을 떠올린 이유는 D.P라는 넷플릭스 드라마 때문이다. 내가 아는 군대 드라마는 ‘ 거탑’이나 유튜브 채널 장삐쭈에서 연재하는 ‘신병’이 전부다. 푸른 거탑과 신병도 나름대로 현실 고증을 잘 해낸 드라마라고 하지만, 내겐 시간 때우기 좋은 영상 정도다. 그러니 D.P에 대한 기대치 역시 딱 그 정도였다.


그렇게 벼운 마음으로 D.P를 봤다. 1화를 다 보고 나서는 왜 이제 봤을까란 생각이 들었고, 흔히 말하는 PTSD가 오면서 내 군 생활이 떠올랐다. 한편으론  저 정도는 아니었지 하며 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2화, 3화, 4화를 보면서는 마냥 옛 추억을 떠올리며 즐겁게 볼 수 없었다. 내 또래들이 군대에서 겪었던, 지금도 반복되고 있을 여러 사건들이 웃음기를 뺏어갔다. 그리고 다시 내 군 생활을 떠올렸다. 그 속에서 나는 방관자였나 가해자였나 아니면 피해자였나.


5, 6화는 석봉의 캐릭터에 압도되어 그 심리 변화에 따라 마지막까지 죽이며 봤다. 그 끝에서 “뭐라도 해야지…”라고 말하는 석봉의 짧은 대사는 외마디 비명이다. 5, 6화는 내 또래 청춘이 군대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 어디까지 참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드라마가 끝났을 땐 앞선 물음에 대한 답이 선명해다. 나는 가해자 피해자도 아니었지만 분명한 방관자였다. 군대라는 사회에 순응하며 어쩔 수 없음을 핑계 삼아 누군가의 가해를 외면하고 때론 동조했다.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내 군 생활을 떠올려 본다. 크고 작은 부조리가 선임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 곳. 뚜렷한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 곳. 내 또래 청춘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곳. 몸 성하게 제대하면 다행이라고 여기는 곳. 군대를 수식하는 부정적 어구는 무수하다. 내가 전역했을 즈음 주변 사람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이야기가 있다. 만약 우리나라가 북한과 전쟁에서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란 질문에 나는 우리가 무조건 질 것이라고 답하곤 했다. 미군 지원, 한국 군사력, 북한의 열악한 상황 등을 고려한 대답은 아니었다. 내 대답의 근거는 전히 꽉 막힌 군대라는 조직 있다.


군대는 상명하복이 가장 중요시되는 조직이다. 전시에 혼란을 없애고 신속한 작전을 돕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요즘엔 거기서부터 야기되는 부작용이 조직 전체를 삼켜버리는 듯하다. 아무튼 내가 경험한 군대는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인 조직이며, 합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구조다. DP에서 헌병대장 명으로 나무를 옮기는 장면이 나온다. 나무만 옮기면 다행이랴, 군대에선 불가능 게 없다. 내가 군대에서 했던 가장 기막힌 일은 산비탈 배수로를 만든 것이다. 포크레인 몇 대면 하루 만에도 끝낼 일을 장병들이 한다. 단지 더 저렴하다는 이유로 간부들은 우리를 부려먹 수 있었. 산 아래부터 정상까지 삽과 곡괭이로 도로 한편에 배수로를 다. 이 말도 안되는 일이 가능한 곳이 군대다. 군대란 그런 곳이다.


이 외에도 불가능으로 남겨둬야 할 일을 기어코 가능으로 만든 적이 많다. 이 과정에서 얻는 건 보람이 아니다. 하는가 라는 의문과 그 끝에는 간부에 대한 혐 남는. 가장 최악은 군 생활 내내 이 과정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내 또래 청춘들은 좌절을 고 체념을 배운다. 그 결과 ‘왜’라는 질문이 기본값에서 소거된 인간이 태어난다. 왜라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지난한 반복으로 깨다. 이자체만 놓고 봐도 인간 도태다. 군대는 한창 왜라는 질문을 던 청춘들에게 ‘왜’라는 옵션을 빼앗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태도는 군대 제대 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극은 학교와 직장으로 이어진다. '꼰대 선배는 도대체 언제부터 꼰대였나'라는 질문의 답은 군대에 있는 셈이다. 처음부터 꼰대인 사람이 어디 있겠나. 왜라는 질문이 사라진 곳에서 까라면 까던 사람들이 꼰대로 태어난 거다. 그 결과, 정도의 차이 있을 뿐 군대 갔다 온 남자 대부분은 꼰대 다. 나는 했는데 너는 왜 못해?와 같든 내로남불적 사고가 굳어진다. 인정하기 싫지만, 군대 갔다 온 남자는 미 꼰대거나 잠재적 꼰대다.


여기에 변명하자면 내 또래 청춘들은 꼰대가 되지 않고 못 베기는 곳에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서 먹고 자며 비슷한 사람들과 생활하다 보면 자의든 타의든 꼰대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군대 제대 후 그러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사람도 많다.  대부분 민간인과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성향이 옅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군대물(?)이 어느 정도 빠졌다고 생각될 때쯤 내 또래 청춘들은 회사에 들어간다.


회사라는 조직은 어떠한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상명하복 중심의 남초 사회 아니던가. 많은 부분에 군대와 유사하다. 어쩌면 군대보다 더 교묘해진 군기 잡기 문화나 은근한 따돌림까지 있다. 고위 간부나 임원은 아직도 남자가 태반이고, 그들이 원하는 인재상은 고분고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등병이다. 이 상황에서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남자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군대에서 겪었던 부조리를 떠올리며 항명할까? 아니면 군대처럼 상명하복 하며 충성할까. 내 예측이 빗나가길 바라지만, 후자가 많을 것이다. 그러면 그 같이 입사한 여자 동기는 어떻게 할까. 난생처음 겪는 부조리에 반대를 외칠까? 이 역시 회의적이다. 결국 남자보다 더 악착같이 충성하거나 아니면 지쳐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한다.


그러면 이 악몽 같은 반복은 영원히 계속될까. 우리 사회는 석봉 같은 사람 없이는 변하지 않을까. 불행히도 변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 대부분 수많은 ‘석봉’이 만들었다. “뭐라도 해야지” 외치는 개인의 희생이 만든 변화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사회는 지금보다 더한 지옥일 것이다.


여전히 사회는 변화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기득권이나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 혹은 내편을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누군가 목이 터져라 외치는 비명은 소음일 뿐이다. 지금 이 사회는 개인의 희생으로 간신히 목숨만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 두 갈래로 나뉘어 서로를 혐오하는 데도 갈등 중재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도 두 갈래로 나뉘어 서로를 혐오한다. 이 구조에서 정상적인 대화불가능하다. 오늘은 혼돈이고 내일은 지옥이다. 혼돈과 지옥 틈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약자들만 고통받을 뿐이다.


내 좁은 시야에서는 이 상황을 타파할 묘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대통령이 바뀌면 나아질까, 국회의원이 물갈이되면 살만해질까를 고민하다 ‘에라 돈이라도 많이 벌자’로 고민의 불씨를 얼른 꺼버린다. 나도 그렇지만 내 또래 청춘들은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더이상 내일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보다 확실한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 ‘돈’을 찾아 떠. 주식, 코인 열차에 몸을 싣고 보이지 않는 종착역인 내 집마련을 향해 몸을 던진다. 요즘 청춘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택한 방법이다. 내 또래 청춘들의 마지막 탈출구가 ‘돈’이 되어버린 것을 누가 욕할 수 있으랴.


청춘을 나무라는 것은 쉬운 길이지만 막다른 길이다. 지금 필요한 건 ‘왜’는 질문이다. '내 또래 청춘들은 왜 그럴까' 단순한 질문 내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길다. 누가 기꺼이 이 길을 걸어갈까. 누구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가려고 하는 지도 중요하다. 어깨는 치고 가라고 있는 게 아니라 내어주라고 있는 거다. 오늘도  '돌아가더라도 괜찮으니 함께 걸어가자'고 말해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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