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더라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대충 어림잡아 이십 년은 된 일이다. 나는 꼬마였고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왔으며 어쩐지 몹시 우울했다.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비디오 대여점이 한 군데 있었다. 그 당시에는 손님이 테이프를 빌려 가 비디오 케이스가 비게 되면 그걸 거꾸로 꽂아놓는 관행이 있었는데 종종 그걸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장대비를 뚫고 비디오 대여점에 대뜸 들어가 빈 비디오 상자를 찾아내 거꾸로 꽂는 일을 반복하기를 수 분 째였는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오빠가 나를 썩 수상쩍게 여기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나는 어떤 기본적이라고 여겨질 만큼의 돌봄을 받지 못했던 터라 보통의 애들보다도 훨씬 꼬질꼬질했고 (놀랍게도 씻는 방법은 배워야만 한다 씻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므로) 옷차림은 계절에 맞지 않았으며 총체적으로 또래보다도 훨씬 어리숙해서 다방면에서 좀 덜 큰 것 같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셨을 거다.
아무튼 어떤 경위로 일이 진행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알바를 하던 오빠랑 놀러 왔던 그 오빠의 여자친구랑 셋이서 비가 그칠 때까지 놀았다. 뭐하고 놀았는지는 잘 모르겠고 사실상 그들이 일방적으로 날 돌봐준 거겠지만 언니가 김치볶음밥을 만들어줬던 기억이 있다. 비디오 대여점 안쪽에 미닫이문을 열면 방이 있었고 거기에 작게 싱크대가 딸려있었다. 거기서 밥도 맛있게 먹고 재밌게 놀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오빠 머리가 아주 짧았는데 막 제대를 하셨거나 휴가를 나오신 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들도 애인이랑 둘이서 재밌게 놀고 싶었을 텐데, 비도 오고 손님도 안 오겠다 아싸리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많이 지나 어느덧 바래버린 기억이지만, 그래서 그 사소한 디테일들을 모조리 잃어버린 낡은 기억이지만, 그때의 포근하고 애달프고 축축한 느낌만은 여전히 선명하다. 비디오의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대여점이 자취를 감추고 그곳이 철물점이 되었다가 이내 곧 슈퍼가 되었지만 어떤 가게로 모습을 바꾸든 나는 그 가게의 구조를 다 안다. 언니오빠랑 그날 거기서 놀았으니까.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생각이 안 난다. 이름도 모른다. 아마 이제 우리들은 바로 옆을 스쳐지나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비 오던 하루 동안 나는 그들이 나를 키워줬다고 생각한다. 언니 사실은요 제가 몇 년 전에는 자취도 했어요 사람이 말이에요 맨날 뭐 먹을지 고민하는 게 일이잖아요 저 자취할 때 볶음밥을 자주 먹었어요..... 그분들은 이제 마흔이 좀 넘으셨으려나? 어디에 계시든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도한다.
영화 속 세계는 흉폭하고도 자상하다. 다정을 취하는 방식이 폭력적일 때도 있고 폭력이 다정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뒤죽박죽 웃기고 평화롭고 서글프다. 나는 그냥 원래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온전한 낙원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상의 곳곳에 작은 오아시스 정도는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나도 누구의 무엇이 되어줄 수 있을까.
영화 본 날. 2022년 6월 10일. 비는 안 왔지만 날씨가 흐려서 몸이 축축 처졌고 그래서 낮잠을 두 시간이나 자버렸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 여전히 살아서 밥도 먹고 낮잠도 자고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해요. 언니 오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