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지낸지 2년 반이 넘어가던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여름이나 겨울이 되면 방학이나 휴가를 맞아 한국에서 온 지인들을 만나곤 했지요. 토리노로 손님이 온 적은 두 번 정도 뿐, 한국과 직항으로 연결되는 밀라노에 지인이 오면 제가 만나러 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한국인들에게 ‘토리노’는 여전히 잘 알려진 곳은 아닙니다.
“너 어디 산다고?”
“토리노.”
“토리노? 거기 로마랑 많이 멀어?”
“이태리가 장화 모양이잖아. 로마는 중남부고 토리노는 북서부끄트머리에 있어.”
“아, 좀 멀겠네. 그럼 밀라노랑은? 많이 멀어?”
“ 비싼 기차 타면 한 시간 싼 기차 타면 두 시간.”
“그럼 밀라노에서 만나자!”
2006년 동계 올림픽과 피겨 선수 김연아 이야기를 꺼내면 그제서야 ”아~~ 거기?”합니다. 성당을 다니는 친구들에겐 예수 성포이야기를 하면 “아~ 거기?” 하지요.
토리노는 자동차 브랜드 ‘피아트’와 커피 브랜드 ‘라바짜’ 본사가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예전엔 토리노하면 다들 회색 공장을 먼저 떠올렸다고 해요. 하지만 지금은 이탈리아에서 녹지 공원이 가장 많은 도시 중의 하나로 꼽히지요.
오히려 제겐 ‘회색 도시’하면 밀라노가 먼저 떠오릅니다.
밀라노에 갈 일이 있으면 한시바삐 토리노행 기차를 타고싶어지더군요. 밀라노의 하늘은……. 낮에는 멀리 보기 어렵고 밤이면 별을 찾기 어렵다고나 할까요?
토리노에서 대학을 마치고 밀라노에서 첫 직장을 잡았던 한 친구와 와인을 한 잔 하고 Porta Palatina 뽀르따 빨라띠나 주변을 산책할 때입니다. 토리노의 오래된 성벽 너머로 마침 달이 배부른 송편처럼 오동통하니 떠서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어요. ‘밀라노밀라노’ 노래를 부르던 그 친구는 갑자기 “아!” 하고 탄성을 터트리더군요. “저 달 좀 봐. 어쩜 저리 예쁘니? 밀라노에선 달 보기도 힘들어.”
세월이 흘러 저는 와인 산지로 유명한 랑게-로에로 지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달이라면 공기 좋은 이 곳 시골에서 보는 달이 더 예뻐 보일테지만……. 지금 제게도 토리노 옛 성곽 너머 밝게 빛나던 탐스럽던 노란 달이 그립습니다.
토리노는 성곽 너머 달만 이쁜 도시는 아니지요.
통일 이탈리아 첫 수도였던 만큼 왕궁이 아름답답니다.
Palazzo Reale 빨라쪼 레알레는 왕궁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왕족들이 사용하던 갑옷, 창, 총이 전시된 무기 전시실에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탐을 냈을 법 한 보석으로 장식된 예쁜 무기들이 가득해 입을 다물기가 어렵습니다.
빨라쪼 레알레 바로 옆 건물에는 왕족들이 사용하던 Biblioteca Reale 비블리오떼까 레알레, 왕궁 도서관이 있습니다. 도서관 지하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과 그의 스케치들이 곱게 보관되어 있는데, (가끔만 공개되니) 운이 좋다면 아주 가까이서 볼 수 도 있지요.
토리노에는 궁전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토리노 역사 중심지구 centro storico 첸뜨로 스토리코에서 뚝 떨어져 있긴 하지만 베나리아 레알레 Venaria Reale 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베나리아 레알레의 꽃! 백 대리석과 흑 대리석의 다이아몬드 문양 바닥이 끝도 없이 이어진 Galleria Grande 갈레리아 그란데에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게 '와!'하는 탄성이 나오거든요.
토리노에서는 매주 두 번째 일요일에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어김없이 거대한 앤티크 오픈 마켓 Gran Balôn 그란 발룽이 열린답니다. 왕실 영화 세트에서 나올 법한 은식기들, 고풍스러운 가구들, 궁금증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금박 액자 안의 초상화들이 몇 시간 동안 걷고 걸어도 다리 아픈 줄을 모르게 만들어요.
햇살 좋은 날, 녹음 사이에서 깔깔거리며 산책을 하고 싶을 땐, 작은 주머니에 땅콩 한 줌을 챙겨서 Parco del Valentino 빠르코 델 발렌티노(발렌티노 공원)에 가지요. 청설모들이 너도나도 달려와 귀여운 작은 손을 뻗어 겁도 없이 손바닥 위의 땅콩을 쏙쏙 집어 갑니다.
발렌티노 공원에서는 늠름하게 경찰을 등에 태우고 공원을 정찰하는 경찰마도 눈길을 뺏습니다.
참, 자전거를 빌려타고 공원 끝부분까지 가 보세요. 열 두가지 달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여신들의 조각상들이 커다란 분수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Fontana dei 12 mesi 폰타나 데이 12 메지(열 두 달의 분수)는 로마의 트레비 분수 부럽지 않은 놀라움을 선물할 겁니다.
자동차 광이라면 놓칠 수 없는 토리노 자동차 박물관, 이집트 카이로보다 유물들이 많다는 이집트 박물관, 영화 애호가라면 꼭 들러야 할 토리노의 랜드마크 영화 박물관, 진위 여부로 논란이 있는 예수 성포가 있는 토리노 두오모…….
한여름 무더위가 끝나면 매일 광장에서 콘서트(MiTo)가 열리는 음악의 도시, 그란 마드레 Gran Madre 를 넘어 언덕 위엔 여왕의 포도밭이 있는 도시, 웅베르토 에코가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 토리노 대학가 헌책방에서 보물을 낚고, 니체가 토리노에 머물 때 매일 산책을 하던 비아 포 Via Po를 따라 걷다 보면 어둠 속 불을 환하게 밝힌 그란 마드레 Gran Madre 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란 마드레 야경을 바라보며 눈호강 하며 아페리티보를 즐기는 삐아짜 비토리오 광장 Piazza Vittorio 은 어떻구요?
‘아니 이 작은 듣보잡 도시에 볼 게 왜 이렇게 많아?’생각이 들 때 즈음, 조금 지칠 땐, 작은 배 모양 초콜렛 잔두이오토 Gianduiotto 나 달콤한 초콜렛 커피 비체린 Bicerin 한 잔으로 예쁜 노천 카페테리아에 앉아 잠깐 쉬어 가세요.
저도 문득, 토리노가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