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바로 그 봄비와 수선화였네
봄비와 수선화의 관계 : '시절인연'
'봄비는 그냥 내렸고, 수선화는 그냥 피었다.'
'그냥' 그 찰나의 교차점의 까닭:
-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참음
- 주고도 내색하지 않은 넉넉함
- 고마움을 잊지 않는 마음 씀
= '묵비권을 행사해도 훤히 알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공동정범의 관계'
- [관계의 물리학 - 림태주] 를 읽던 중 메모한 내용 -
친구가 혼자서 인간관계로 많이 힘들어하던 때가 있었다. 당시 나는 내 일로 정신이 없어 친구들과의 만남이 모두 뜸해지고 있던 중에 당분간 연락이 힘들 거라며 그래도 걱정은 말라는 친구의 카톡을 받았다. 두어 통 걸어도 받지 않는 전화를 보면서 친구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처음 든 나의 생각은 그랬다. 친구가 겪었던 일들을 설명하기엔 지금은 다소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한 상태이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얘기하고 설명하는 것 또한 힘을 소요하는 일이니, 혼자 충전할 시간이 필요하기에 이런 카톡을 남긴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난 친구로서 어떻게 답변하는 것이 그 친구에게 좋은 길일까. 고민 끝에 결국 어떤 일인지 묻지도 않은 채 털어놓을 곳이 필요할 때 언제든 연락 달라는 답장만 보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 생각하며 단지 친구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고 기다리기를 택했던 것 같다.
한 두달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1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친구를 잃을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고, 내 할 일을 핑계로 뜸하게 연락을 하다 친구가 가장 힘들 때 곁을 지켜주지 못한 것 같은 미안함과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더 이상 알 길이 없어 최악의 상황까지 그려가고 있던 탓에 걱정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친구의 상황과 감정은 하나도 모른 채,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섣부르게 갖는 나 혼자만의 상상이자 일방적인 감정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야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마냥 기다리기보다, 진짜 친구라면 뭐 하나라도 안부를 물으며 다가갈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일었다. 늘 적극보다 방치에 가까웠던 나의 관계적 관습을 바꿔야겠다 생각하며 그렇게 조심스레 카톡 한 통을 넣었다. 잘 지내고 있냐며, 계절이 바뀌니 작년에 너와 여행을 갔던 게 생각난다며 편할 때 연락 달라는 말을 남겼다. 이 카톡도 마찬가지로 곧바로 1이 사라지진 않았다.
일주일 즈음 지났을까, 친구에게서 잘 지내고 있냐는 톡이 왔다. 그동안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고, 보고싶은데 괜찮으면 조용히 날을 잡아 보자고 했다.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어떤 감정에서 나온 것인지 딱 떨어지는 문장으로 정의내리지 못 하겠다. 다만 멀어지는 인간관계를 흘려보내는 데 익숙해졌다 해도 절대 이 친구에게만큼은 그러지 못 할 거였다는 걸 마음 깊이 깨달았다고만 할 수 있겠다.
친구를 만나 밤 늦게까지 술 한 잔 걸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예상치 못하게 힘든 일을 겪고서 아무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카톡까지 삭제했다고. 친구가 받았을 충격에 가히 공감하지도 못했고, 더 큰 일을 당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차마 입에 담을 생각도 못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들으며 다행이라고 먼저 말하는 담담한 친구 앞에 이도 저도 못 한 채 되려 내 눈시울만 붉히는 이상하고 부끄러운 모습만 보였던 것 같다.
이후 감정과 상황이 차차 나아지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친구를 한참 동안 알고 지내왔지만 이렇게 힘든 일을 겪은 모습은 처음인 것 같다고, 그동안 나 바쁘단 핑계로 너의 힘듦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너무 나 자신만 챙겼던 것 같아 후회도 하고 미안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시간이 필요한 듯 보여 기다렸지만서도 친구로서 연락을 더 해봐야할지 고민이 많았다며 어떻게 하는 것이 네게 편했을지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친구 왈, 몇몇 친구들은 끝끝내 연락을 취해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말을 안 해 통 서운해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했다. 물론 그 친구들 모두에게 고마웠지만, 당시에는 누구에게 털어놓는 것 자체가 감정 소모였을 때라 그게 주변에게 몹쓸 짓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시간을 갖고자 카톡을 삭제하게 됐다고 했다. 친구가 말하길, 내가 속으로 걱정하면서도 자신에게 부담될까봐서 말을 아끼는 게 느껴졌다며, 있는 그대로 자신을 믿고 묵묵히 기다려 준 내게 너무 고마웠다고 했다.
신기한 건 친구도 비슷한 시기에 나에 대한 걱정에 못 이겨 카톡을 새로 깔고 먼저 연락했다는 것이었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니 힘들 때에 곁을 지켜주지 못 하면 어쩌지란 걱정이 순간 일어서, 다른 사람 만날 생각은 못 하고 일단 나를 만나야겠단 생각에 연락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어쩜 서로를 그리다 연락하는 타이밍이 이렇게 맞았냐며, 그래서 우리가 성격은 정반대여도 영혼의 단짝이 아니겠냐며 함께 웃는데 나 또한 친구에게 형용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무르익기를 기다리다 함께 사랑의 꽃을 피우는 '시절인연'도 있겠다만, 친구와 나 또한 당시에 '시절인연'이지 않았을까 싶다. '묵비권을 행사해도 훤히 알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공동정범의 관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있음을 마음 깊이 느끼는 것. 떨어져 지내도 잊지 않고 마음을 쓰는 것.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스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이. 친구와 한 단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글을 쓰면서도 내가 바라는 인간관계의 지향점이 여기 이 봄비와 수선화에게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