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들이 있다.
밥을 할 줄 안다고 한다.
“그냥, 쌀 씻어서 넣고 물 넣어서
전기 밥솥 스위치 누르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쌀 물의 양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잡채를 만들 줄 안다고 한다.
잡채 만드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당면이랑 야채 넣어서 볶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잡채의 맛을 위해 어떤 양념이 들어가야 하는지 모른다.
사랑을 이런 대단하지 않은 요리법에 얹어서
얘기하려는 나에게 “그게 뭐야-”라고 말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에게는 사랑도, 음식도 생명과 직결된 필수조건이기에.
음식을 먹지 못한 육체는 결국 죽고,
사랑을 받지 못한 영혼은 결국 죽는다.
그것이 나의 (몇 안 되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 이제야 알게 된 결혼의 조건
혹시 이런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혹시 이런 사람과 이미 결혼했다면
음…. 만만치 않았을 당신의 결혼 생활에
위로를!
사랑을 알게 된 것은, 남편을 만난 후가 아니었다.
3년의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 연애,
1년 신혼 기간은 사랑이 아닌 사랑의 느낌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내가 사랑을 배운 곳은, 아주 비인격적인 시간 속에서였다.
상대는 나를 전혀 배려해주지 않았다.
나는 상대의 돌봄을 받을 수 없었다.
반대로 나는 하루종일 온마음을 다해 그녀를 돌봤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눈동자, 입꼬리의 각도, 손가락의 위치와
몸의 방향을 살폈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실패했고,
그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속된 실패와 좌절이 쌓여도
“에이- 몰라”하고 그녀를 떠날 수가 없었다.
"내가 없으면, 그녀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무겁고 단단한 책임감을 만들어 내던지.
첫 아이, 소윤이가 태어나고 1년 동안,
나는 그렇게 한 사람의 마음을 알기 위해
온전히 나를 잊고, 상대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다, 그런데 행복했다.
이게 가능한 문장인가!
어떻게 모순된 두 문장이 연결된 문장으로 내 안에서
만들어질 줄이야.
사랑은 이와 같은 신비였다.
사랑도 모르고
사랑할 능력도 없는 존재에게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 a를 원하면서도 z를 말한다
사랑은 핑크빛 좔좔 흐르는 새콤달콤함 그 너머에 있었다.
사랑은 노동이었다.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이었다.
몸을 움직여 상대의 필요를 채워줄 때
희미했던 사랑이 선명해졌다.
그런데,
사랑의 노동보다 더 힘든 것은
상대의 마음을 아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면 당신이 좋아하겠지.”라는 생각은
자주 틀린 답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게 사랑의 방법이지” 하고
확신한다면, 상대가 원하는 사랑에서 멀어지기 쉽다.
“아니-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 해줬는데,
고마워하기보다 불평한다고….!”
(내가 다시는 해주나 봐라)”
이런 마음은 귀를 돌처럼 굳게 만들어
상대가 원하는 그것을 더욱 듣지 못하게 막는다.
갓 태어난 첫째 아이는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니
아이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했고
참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말을 들을 줄도 알고
말을 할 줄도 아는 배우자의 마음 읽기는
그보다 더한 난코스다.
부부 관계의 대화에서 흔히 겪는 심화 문제.
a를 원하면서도 z를 말한다.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상황이 벌어지면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싫어했지를 호소한다.
이 외에도 소통을 방해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다.
(이전에 쌓인 정보, 잘못된 지식, 삐진 마음…등등)
이렇게 부부의 소통은 참으로 어렵고 어렵다.
#결혼 전, 이런 경험이 있는지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묻고
그 마음을 들어주는 마음.
그리고 몸을 움직여 그 필요를 채워주려는 태도.
이 모든 것을 나는 돌봄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쯤에서는 말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을 고민해 보시길.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마음을 묻고 듣고,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 몸을 움직여 애쓰며
“누군가를 돌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결혼 반대다.
연애 시절에 나를 그렇게 돌봐주었다고?
그런 시절이야 감정충만으로 이루어졌던
돌봄이 아니었던가.
그런 돌봄은 결혼 후 곧 사라진다.
사랑하는 연인이 아님에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땀을 흘리며 타인을 돌봐본 사람이라면
돌봄의 경험이 몸에 남아있지 않을까.
결혼 후,
사랑이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닌
노력해야 하는 감정이 되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그럴 때는 몸의 습관에 의지해야 한다.
그래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혼 생활이 그래도 좀 수월하지 않을까.
(사랑도, 인생도 이런 조건이라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일반화가 불가능하기에, 그저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본다.)
#사랑이 선명해지는 시간
밥을 할 줄 안다고 하면서도
쌀 물의 양을 어느 정도 맞춰야 하는지 모르고,
잡채를 만들 줄 안다고 하면서,
잡채 만드는 모습만 봤던 것이 전부였던 사람이 나였다.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상대를 사랑하는 것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말하지 않아도 당신이 나의 필요를 눈치채주길 바랐고,
내가 바라던 그 모습으로 나의 필요를 채워주기를 꿈꿨다.
하지만 결혼 후 그런 판타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랑할 능력도 전혀 없고,
사랑의 방법도 전혀 모르는 존재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사랑을 알지 못했을 것 같다.
첫째 아이를 키우며 나 자신이 먼지처럼 사라진
육아 기간을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랑은, 사랑하는 존재의 생명이 계속될 수 있도록 돌보는 것임을.
하는 일이 번번이 좌절되고, 관계가 어려워지고,
주변에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으면
마음은 어린아이가 되기 쉽다.
그런 어린아이가 된 어른의 마음에도 돌봄이 필요하다.
사랑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는 순간에
사랑은 가장 선명해진다.
그래서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가 보다.
추석 연휴다.
친정으로 시작해서
시댁으로 한 바퀴 돌고 나면
연휴가 끝날 것 같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혼은 가족의 경계를 넓혀 놓았다.
돌봐야 하는 관계가 더 넓어지고
부담의 무게를 견디며 걷다 보니
팔뚝에는 근육이 생기고,
다리에도 알이 박여서 두툼해졌다.
넓어진 가족의 관계만큼
품을 넓히고 쿵쾅거리느라
마음도 여기저기 울퉁불퉁해졌다.
하지만, 나 때문에 다른 가족 또한 몸과 마음에
쌓였을 굳은살과 울퉁불퉁해진 마음도
떠올려 보려고 노력한다.
(노력으로 안 되면 가끔 한쪽 눈을 감고
적당히 보며 살려고 한다.)
사랑은 돌봄이다.
사랑은 상대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내가 이만큼 살아있는 것은,
당신의 돌보는 마음과 노동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