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은 여기에서부터.
3년 전쯤 한 모임에서 이런 미션을 받은 적 있다.
자기소개 하기. 단, 나이와 직업은 빼고.
그리고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일은 내 삶의 전부가 아니야! 라고 소리치고 다니곤 했지만,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비록 3년 간 브런치를 떠나 있었지만) '자기소개 하기' 그것을 자연스럽게 하게 될 날을 기대하며, 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 이후로 나는 종종 '자기소개'를 잘하기 위해 스스로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했으며, 실로 지난 3년간 이것은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하게 자리 잡았고, 어떠한 가치관을 새로 정립하는 포인트가 되기도 했다. 이는 큰 인기를 끌며 종영한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해방클럽 사람들이 글을 쓰는 것과도 퍽 닮아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가. 드라마를 보는 내내 3년 전 그 모임이 계속 떠올랐고, 3년 전에서 멈춘 브런치 앞으로 다시 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최근 <유퀴즈 온더블럭>에서 김영하 작가님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만약 나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쓴다면 그 첫 문장은?' 그리고 작가님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나라는 사람을 책으로 쓸 거라면 그 첫 문장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소개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성인이 된 이후 자기소개라 함은 응당 면접에서 1분 동안 채용해달라고 어필하는 시간에 지나지 않았고, 그에 익숙한 성인들은 으레 나는 누구고, 몇 살이며, 어떤 일을 잘할 자신이 있고, 앞으로 필요한 인재가 되겠다고 한껏 자신감 있게 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 말고, 나이도, 직업도, 다 필요 없고 진짜 나에 대해 소개하라고 하면 술술 말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위인전처럼 '한반도 어느 작은 마을에,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몇 년도 몇 월 며칠이었다.'라고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어쩐지 나를 오롯이 설명해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객관적으로도 보고, 주관적으로도 보고, 나는 무얼 좋아하고, 무얼 잘하는 사람인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이런 걸 고민 없이, 잘 말하게 되는 것, 그것에서부터 나의 '해방'이 시작되는 거 아닐까. 그것이 바로 깨고 나아가야 하는 알, 세계가 아닐까.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
나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왜, 나를 소개하기도 어려운 사람이 되었을까. 그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절망적이지만 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없는 사람. 모든 게 타인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내 삶에서 '나'는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5세, 그 당시 이미 '누군가가 그 삶을 스스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마주한 적 있었던 나는 모든 관계가 불안했고, 항상 눈치를 살폈으며, 늘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런 나에겐 도박하는 부와 그 뒷감당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모가 있었고, 나는 자연스레 내 부모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의 뒷감당도 내가, 모의 감정 쓰레기통도, 의지가 되어줄 친구도 내가. 그러니 내 인생은 '부모'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고도 잠시라도 행복하면 죄책감이 생겼다. 내 부모는 행복하지 않은데, 내가 감히 행복해도 되는가? 20대 초에 친구를 따라 한 달 동안 유럽으로 떠난 적도 있었다. 내 생에 첫 나를 위한 시간이었고, 정말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후 모에게 '하고 싶은 일은 다하고 사는 애'라는 말을 듣고는 곧장 느낀 행복만큼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 이후로는 학교와 일을 병행하고, 주말에는 '모'의 일을 거드는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 뒤로 내 쉬는 날은 '모'의 일을 끝마치고 집에서 자는 것, 또는 친구들과 집 근처에서 한 잔 하는 것뿐. 그 이상은 사치처럼 느끼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 사람인지, 특기는 무엇인지, 그래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사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 내 미래는 오로지 '부모' 뿐이었고, 나를 위해서는 어떠한 준비도,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이다.
즉, 나는 자아가 없었다. 아니 자아가 있는데, 부정하며 살았던 것이다. 중간중간 자아가 생기면 연애도 하고, 여행도 나갔다가, 다시 자아가 사라지면 내 인생은 오로지 부모라며, 다 떠나보내고, 모두를 떠나왔던 것이다. 그러고는 무슨 확신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당연히 내가 일찍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30대까진 아니더라도 50대까진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듯싶다. 나는 내가 어떠한 형태로든 그 시절이 되면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내 나이 50대면 우리 부모님이 90대이므로 한국인 평균 수명을 고려했을 때 그때쯤이면 아마 부모님이 돌아가실 거고, 그러면 나도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내 시간이 소중하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한다. 나는 비로소 내 자기소개의 첫 문장을 쓸 준비를 마친 것이다.
나는 다정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다정한 이웃, 친구이자, 가족, 그리고 동료, 애인이 되고 싶다. 요즘 나는 오로지 그것에 몰두하고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를 다정하게 대해주는 게 좋으니까. 그 '다정함'이 얼마나 위대한지,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지난 3년간 지겹게 겪고 또 겪었다. 때로는 그 다정함이 독이 되기도 했지만, 나에게 때로는 독이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는 것에는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정말이지 '다정함'에 웃고 울다 또 웃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본다. 나 스스로를 다정하게 보고, 또 그들을 다정하게 바라본다. 그것은 가엽거나 불쌍한 것과는 다르다. 죄책감은 더더욱 아니다. 다정함에는 마음이 따르고, 그 마음에는 다양한 사랑의 감정들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런 마음이 들 때, 비로소 무언가 가득 채워진 느낌을 받는다.
어제 나의 해방일지 마지막화에 주인공 '미정'이 이런 말을 했다.
"나 미쳤나 봐.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마음에 사랑밖에 없어. 그래서, 느낄 게 사랑 밖에 없어."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사실 스스로를 미워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결국 자기혐오, 혹은 자기 학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결국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 미정은 자기혐오를 깨고 나와 자신을, 세상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나도 그렇다. 다정하게 '모두'를 바라보고 싶다. 그 '모두'에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 나는 나를 더욱 다정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타인도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다정함으로 되돌아오진 않겠지만, 그것은 또 다정한 나와 내 사람들로 인해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니 '다정함' 그거면 충분하다.
자존감이 바사삭 부서지고, 자신감, 자기애, 그런 거 하나 없이 너무 오랜 시간을 그렇게 낭비해왔다. 이제 낭비할 시간이 없다. 시간이 아깝다. 다정함은 그런 시간을 지나 오늘에 이른 내가, 나로 존재하는 최선의 방식이 된 셈이다. 그렇게라도 시작하려고 한다. 그래서 내 첫 문장 '나는 다정함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는 완벽한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