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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작가 Jan 30. 2024

타고난 작가의 끼, 초등학교 때부터..

봉숭아학당 연극 패러디 사건

때는 초등학교 4학년. 나는 반에서 '대단히' 까부는 아이였다. 무슨 일에든 앞장서야 직성이 풀리는 '대장'으로, 따르는 친구들도 많았다. 엄마가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선생님들을 살뜰히 챙긴 덕분에 더 목소리를 크게 내던 천하무적-


'책거리'라고, 그 시절 교실에서는 학기말이면 작은 자축 행사를 치렀다. 책상을 삥 두르고 앉아, 중간의 빈 무대에서 장기자랑을 하고, 맛있는 간식을 나눠먹으며 떠들고 웃고 노는 판이다. 다만, 장기자랑은 상금이 걸려 있는 경쟁이었으므로 우린 자존심을 걸고 진지하게 책거리를 준비했다. 조를 나눈 후, 각 조장을 뽑고, 노래든 춤이든 성대모사든 뭐든 해야했다.


책거리 2주 전- 나는 1조의 조장을 맡았고, 제비뽑기로 조원들을 선발했는데. 이런 아뿔싸...나랑 친한 애들은 한 명도 없고, 말 한번 안 섞어 본 애들이 대부분인데다 


말이 느리고 말을 더듬는 애

비염이 심한 코 찔찔이

사사건건 따지는 잘난척쟁이

웅얼웅얼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극소심쟁이

여잔데 선머슴같은 애


11살 어린 내 눈에 그 애들에게선 어떠한 끼도 보이지 않았고, 끼는커녕...‘찌질’ 그 자체였다. 앞이 캄캄했다. 얘네들이 뭘 할 수 있을까? 꼴찌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참담한 마음을 뒤로 하고, 나홀로 아이디어를 궁리했다. 마침내. 당시 유행하던 개그 코너 <봉숭아 학당>을 패러디한 <봉선화 학당>을 추진! 며칠 밤낮으로 머리를 쥐어짜 대본을 쓰고, 친구들을 어느 지하실로 집합시켰다.


대본을 쥐어주며,

"이대로 연습해!" 스파르타 훈련 시작.


결과는?

눈치만 살피며 쭈뼛쭈뼛, 대사를 외우지도 못했으며 AI같은 발연기는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1등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한 나와는 달리, 친구들은 아무런 의지도 볼 수 없는 멍한 눈으로 꾸역꾸역 연습 시간을 버티고만 있었다. 그와중에 따지기 좋아하는 애는 불만을 토로했고, 나와 대판 싸우기까지.

"야야!! 다 때려쳐!!! 이것도 못 외우냐? 아씨!!"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일이 다반사.


그리곤 다시 나타나 사납게 아이들을 몰아붙인 나.

"왜 대사를 칠 때 자꾸 말을 더듬어? 빠르게 또박또박 말하라구. 대본대로 하란 말이야. 넌 왜 자꾸 코를 훌쩍거려? 야야, 넌 치마를 입으라구. 선머슴처럼 그게 뭐야? 넌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잘난 척 그만하고 시키는대로 해!"


너무 힘들다며, 지하실을 탈출(?)하려는 애들을 붙들어 앉히고, 불같이 화를 내며 나는 더욱 엄격하고 위악적인 교관이 되어갔다. 책거리 1주 전. 사태는 더 심각해졌다. 아무리,,, 연습을 시켜도, 나아지는 게 없었다. 나만 보면 바짝 얼어붙는 친구들에 한숨만 나왔다. 꼭 1등을 해야하는데!! 내가 공들인 기똥찬 대본을 이따위로 연기하는 애들 때.문.에. 다 망하게 생긴 거다.


책거리 3일 전.

'이대로 포기할까? 역시, 이런 애들로는 무리였어.'

"너네 마음대로 해라!! 우씨!!"

날카롭게 쏘아붙이고선, 다 내려놓으려던 그때.


나는 번뜩. 새로운 방법이 떠올랐다.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를 억지로 친구들에게 연기시키는 게 아니라, 친구들 본연의 캐릭터를 연극에 그대로 반영해보자는 역발상! 말을 더듬는 아이에겐 말을 더듬는 역할을, 코찔찔이에겐 코찔찔거리는 역할을, 선머슴같은 애에겐 선머슴 역할을, 소심쟁이에겐 소심한 역할을, 잘난척쟁이에겐 선생님 역할을 부여했다. 나는 뭐하냐고? 나는 총감독이자, 봉선화 학당에서 가장 까불고 멋대로 하는 주인공을 맡았다.


기존의 대본은 다 찢어버리고, 친구들의 특징과 말투와 행동을 극대화한 새 대본을 완성! 친구들에겐 대본대로 하지 않아도 좋으니, 본인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부.탁.했.다. 하루 아침에 상냥해진 내 모습에 더 겁을 먹은 친구들을 어르고 달래, 마지막 3일 동안 혼신을 다했다. (1등을 위해서라면 무릎이라도 꿇을 각오가 돼있던 나)


책거리 D-Day! 두둥!

가장 마지막 순서였던 우리가 교실 중앙에 섰을 때, 아이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딱 봐도 '노잼' 멤버들의 조합이었으니. 그러나, 지휘자가 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지...이것드롸...! 연극이 시작되고...여기저기서 빵!빵! 웃음이 터져나왔다. 덕분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친구들의 눈빛이 점점 강렬하게 반짝거렸고, 상상 그 이상으로 명연기를 펼쳤다.


“아...아녕하..데여...나뉸 말을 더드드 듬어여” 

말 더듬이는 말을 더 심하게 버벅였고,


“킁킁...(코푸는 소리)퓅! 아 제가여 비염때메 엣취!!” 

코찔찔이는 냅다 퓅!하고 코를 풀기도 했고,


“너네 똑바로 안 해? 장난칠 거니? 자세 바로 하구!” 

쌤은 세모난 안경을 추켜 올리며 교탁을 탁탁 두드리면서 참으로 얄망궂게 지적질을 해주었고


“즈기............” 

소심이는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기가 막힌 극I 연기를 보여주며 몸을 배배 꼬았고, 


선머슴은 모자까지 벗어던지며 빡빡 깎은 머리를 뽐냈다.


아니, 이렇게 빛나고 멋진 녀석들이었다니?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들뜬 분위기에 흥이 오른 나는, 대본에도 없는 애드리브를 시도! 우스꽝스런 대사를 날리며 후드를 눌러쓴 채 솟아오르듯 점프!!!이어, '현진영고진영고' 노래를 부르고 막춤을 췄고, 아이들은 먹던 음료를 뿜으며 쓰러졌다.

결과는?

1등!!!!


이때, 난 귀한 교훈을 얻었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가 가장 예쁘다는 것. 


세월이 흐르고 흘러...작가가 된 나는, 우리가 정한 틀에 인물을 꿰맞추는 게 아닌, 주인공의 캐릭터 그대로를 따라가 스토리를 극대화하는 형식의 휴먼 다큐멘터리를 기획했고 만들었다.



브런치에 이따금 요런 깨알같은 에피소드도 담아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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