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23. 장석주의 "마흔의 서재"
우연히 장석주의 "마흔의 서재"라는 책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책읽기와 사색이 일상이 된 작가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그야말로 성실한 지식인의 전범(典範)처럼 여겨지는 장석주의 생활과 사색의 내용이 담담히 전해지는 에세이집이지만, 자신이 읽는 책의 메시지를 연결하는 독서노트같기도 한 책이었다. 한편으론 책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을 위해 작가가 선택하여 읽는 책은 무엇인지, 어떤 부분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색에 잠기는 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 수도 있어서 친절한 책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장석주식의 글쓰기와 나름 진지한 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나에게도 큰 덩어리처럼 가슴 속에 담겨있는 마흔이라는 숫자와 나이와 관련된 글들이라 곧 바로 눈에 들어왔고, 그 내용 또한 예상하고 기대한 그대로였기에 허투루 하지 않고 최대한 몰입하며 읽고자 하였다. 이미 출간된 지 10년도 훨씬 넘은 책이었는데, 그만큼 그동안 내가 책에 대한 무관심과 편중의 정도를 알 수 있게 해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나를 자극하는 글들이 많아 새삼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글들을 읽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내가 스무 살쯤부터 장석주를 알고 있었다. 우연히 신문사의 신춘문예 발표에서 그의 이름을 본 것인데,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던가, 수많은 사회적 정보들 중에서도 유독, 서로 안면식도 없는 이였는데, 내 기억 속으로 들어왔다.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무 살 중반 무렵이었을 때에도, 나는 틈틈이 장석주의 글이나 근황 등을 언론 등에서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삶의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흔들리고 있었으며,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등 미래로 향해 가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큰 틀에서 인생의 판을 짜는 능력과 사고가, 정립은 커녕 갖춰져 있지 못했기에 그랬던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내면에서 갈등을 겪으며 고민 속에서 방황하던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사회진출을 해야 했던 나는, 그 전까지 가지고 있던 문학이니 뭐니 하는 것에서부터 깊은 당김조차 없었던지, 그저 직장을 구하기에 바빴으며 적당한 시간 내에 선택한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절박한 목표의식만이 마음속에서 구체화 될 뿐이었다.
그때 내가 선택한 직장은 그 전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광고회사였다. 언론사에 들어가 직장생활도 하고 글도 쓰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을 꿈꾸며, 그것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신문사, 방송사를 여러 군데 지원하고 시험도 봤지만 모두 낙방한 끝에 겨우 입사 시험을 통과하고 선택받은 곳이었다. 당시에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원율이 꽤 쎈 편이어서 100대 1을 훨씬 넘는 경쟁률을 통과했다는 속물적인 위안은 있었으나, 실제로는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일반적인 직장생활에 대해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 경제적 목적으로 구한 직장이었지만, 그간에 꿈꾸고 기대한 인생의 방향과는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나기나 피하자라는 말 같지 않은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또한 세상 물정 모르는 어설픈 명분일 뿐 다른 대안도 없는 나의 수준에서의 차선일망정 행운의 기회였음을 당시에는 잘 몰랐을 만큼 나는 세상에 대해 많이 어설펐다.
이런 과정을 거처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가며 살아가는 중에도 나는 흔들리고 눈길이 흩어진 채 현재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서점을 가면 문학서적코너 앞에서 기웃거렸고, 신문의 문화면 기사에 관심을 두었고, 연말 연시 신문사의 신춘문예 공고와 결과를 나도 모르게 눈 여겨 보게 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눈에 들어온 신예작가들의 이름들이 일방적으로 내 기억 속에 들어왔고 나는 그들을, 겨우 등단한 초보 작가에 불과한 그들을 매우 선망의 대상으로 기억 속에 간직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런 부류 중에 장석주가 포함되지만, 그는 그 이전에 이미 등단을 한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였다. 나보다 불과 몇 살 더 연장자인 그는, 이미 등단시인이면서 문학평론으로 당선까지 된 이였으니, 당시 나에게는 넘사벽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더욱이 그는 상세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좀 특이한 이력으로 해서 더 관심을 끌었고 더 특별하게 생각하였던 것 같다.
신문사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또 곧이어 문학평론으로 당선되는 그의 이력이나 능력이 당시 어린 나에게는 좌절감을 느낄 정도로 뛰어난 존재로 여기게 할 만 했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솔직히 문학이 무언지도 잘 모르는 채, 어설픈 문학공부와 글쓰기를 시도하며 막연히 글 쓰는 일이 내 생애의 과업인가 생각하는 수준에서 마음의 갈등을 겪을 뿐이었고, 그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년생인 때에는 이런 감정적인 임팩트impact를 겪게 한 그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대부분의 문인들에게는 해결과제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는데, 스스로 자신의 출판사를 열어 출판 사업을 활발하게 함으로써 경제적 성공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세속적 힘까지도 갖춰가는 것에 남다른 인상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미 뒤쳐지고 방법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엉뚱한(?) 곳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중인데, 그는 어느 사이 그런 글들을 썼나싶게 꾸준한 글쓰기를 하였던지 평론집을 출판한 것에 다시 부러움과 놀람을 겪게 하였다. “한 완전주의자의 책 읽기”는 그때 내게 완전하게 그의 위상과 위치를 인정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였다. 그 이전에는 그저 김현, 김치수, 김병익, 곽광수 등 문학평단의 일부 엘리트(?)들 정도만 알고 그들의 책을 조금 읽으며 조금씩 무언가를 알아가던 중이었는데, 새로운 쪽에 강력한 누군가가 등장한 느낌이었다.
뭘 모르는 자의 편견에 의한 생각이니 세상에 대해서는 그리 의미있는 생각은 아니지만, 난 그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의 이십대 후반 무렵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 이후엔 그나마 문학적 소양으로 부터 더 뒤처졌고, 그저 나는 일반 독자로서의 지위 정도를 유지할 내공(?)조차 쉽지 않은 존재가 되었을 뿐이며, 나아가 내가 속한 영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느 정도 애를 써야 했으므로 나는 문학과는 더 상관이 없는 분야의 책들을 읽거나 공부해야 했으니, 이미 판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여러 해를 보냈고, 나는 문학이 아닌 경영학을 새로 전공하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나름대로 연구 활동과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20대의 내 생애를 지배했던 꽤 많은 문학이론서와 시, 소설책들을 그간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지금까지도 끌어안고 있고 그것들을 들춰보는 노력을 한 끝에 부끄러우나, 뒤늦게라도 문단에 등단한 시인과 수필가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중에 내게 장석주는 여전히 누구보다도 특별한 작가로서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 출판된 그의 저서들을 지금도 틈틈이 장르와 상관없이 수시로 읽어보기도 한다. 세월 탓에 내가 젊을 때 만큼의 자극은 없을 지라도 이미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된 듯하다. 그래서 최근에 그의 신간 저서는 아니지만『마흔의 서재』를 읽으며, 우연이지만 내가 선택한 문학적 선배(?)요, 선망을 느꼈던 그의 진솔한 생활 속 문학 인생과 생애의 철학적 사고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여전히 7~80년대에 그가 내게 준 느낌과 정서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세계가 그만의 스타일로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과 더불어 진지하고 성실한 삶과 문학에의 태도가 그의 문장과 언어 선택에서 전해진다. 무엇이라 지적하지 않아도 전체적으로 받은 그 인상이 내게는 그러하다. 젊은 날 전해진 영향력은 잘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묘하고 놀랍게도 그간 숱한 세월과 경험이 있었을 텐데도 장석주 역시 내가 읽은 젊은 시절의 자기 특성을 고집스레 지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하니 더욱 다행이라 할 만큼 친근하면서도 신뢰감이 더해진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이나 문체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것으로부터 자극을 받거나 찾으려하는 문제의식이 여전히 진정성있고 진솔하다. 세상에 대한 겸허함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성실한 자기관리와 루틴routine화 되어 있는 독서와 성찰 그리고 글쓰기의 과정이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일정하게 흘러가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한다.
나는 비교적 꼼꼼히 "마흔의 서재"를 읽었다. 이미 국내 문학계의 어른이 된 상태임에도 조금도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철저함이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그런 철저한 자기관리는 꾸준한 독서와 자연과 현실의 것에 대한 성찰과 관심을 지속하면서 자신으로부터의 반응과 반추를 해내도록 독려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였다. 그의 다양하고 깊은 책읽기는 그가 가지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역할, 그리고 이미 성숙된 교양과 지식의 수준을 고스란히 전해주니 그로 인한 배움도 적지 않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독자편의적인 글쓰기의 주제의식과 내용의 구성은 원래의 의도는 아니었음에도 독자지향적인 고려, 또는 배려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한다.
진작에 나도 젊은 시절에 제대로 문학계에 입문할 수 있을 만치 스스로를 이끌었었다면, 그래서 뭔가 자신의 삶의 과정이 옳은 건지 그릇된 건지 고민함이 없이 직진하면서 다소는 효율적으로 시간과 몰입의 효과를 통해 만족스런 삶에 대한 피드백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면, 그리고 장석주와 같은 작가와 오래전부터 교우할 수 있었다면, 나의 삶의 어느 부분들은 보다 더 풍요롭고 가치로움으로 해서 더 즐거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아쉬운 마음으로 해 보고 있다.
오래 묵은, 그래서 깊은 신뢰가 있는 마음의 교류가 있었던 것처럼 오랜 만에 마음속 깊이에서 반응하는 책 읽기를 경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