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24. 장석주의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안에 태풍 몇 개
저안에 천둥 몇 개
저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하략)
장석주의 “대추 한 알”의 앞 연이다. 한동안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교보빌딩 외벽 '글 판'에 게시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며 읽고 관심을 기울기도 하였다. 대추 한 알이라 하니 어떤 과일보다도 작고 보잘 것 없어(?) 눈에 덜 띌 뿐 아니라 과일 취급조차 받지 못한다. 이런 대추를 보고 이와 같은 기막힌 시감(詩感)을 읽어 냈다. 생명의 소중함까지 전해지니 대추 한 알을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의 숭고함과 그에 따라 인간의 위대함까지 연상하게 하는 폭발적인 감동을 엮어 낸 셈이다. 이런 시를 써낼 수 있기까지에는 작가 자신의 안목과 성찰이 어느 경지에 이르러야 했을 것이다. 이 시는 장석주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보여주는 삶의 관점과 핵심이 어디로 잇닿아 있는 것을 알게 해준다.
내가 장석주를 개인적으로 잘 알 수 없다고 해도, 나는 이 시인이 세상의 사물을 허투루 보지 않으며, 성찰의 속내가 매우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으니 소홀히 대하거나, 또는 과실에 속하는 지도 인식하지 못할 ‘대추’를 주목하며 이런 거대하고도 지엄한 자연의 섭리와 우주의 이치를 담아내면서 사람이 가진 깊은 터득과 섬세한 인간적 감성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누구라도 마음에 섬뜩하니(?)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시를 세상에 내어 놓았다.
우리는 마치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에 집중하면서, 소홀이 하거나 오해하는 것이 있다. 본질보다는 행동에, 내면에 있을 깊은 뜻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빛나는 것에 우선하여 자신을 집중하려 한다. 그런 인식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가운데, 오로지 자신만의 길에서 걸리적거리는 것을 헤치고 나가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 법한 것들을 선택적으로 보고 듣고 행하려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런 삶의 관점은 사람마다 다소 다르다 해도 대체로 사람들은 많은 것을 놓치고,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면서 허둥대거나 거칠게 자신을 다루면서 나아간다. 자신이 본 것은 고작 자신이 볼 수 있는 알량한 것이었고, 자신 수준에서의 허튼 가치임을 알고나 있는지, 한편으론 으스대거나 거만을 떨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운이 좋은 것일 뿐인 것을 모르고 스스로를 자화자찬하기도 한다. 가관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이룬 허세에 주목하고 마치 큰 것이나 이룬 듯이 관심을 두기도 한다. 반대로 다른 많은 사람들은 뜻을 이루지 못해서, 세상 일이 자신의 뜻과 달라서, 나보다 남이 더 쉽게 더 잘 이루어 낸다고 믿고 스스로는 힘이 드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나보다 더 나아서, 나보다 잘 나서 화가 나기도 한다. 세상일이 스스로에 의해 비롯되는 일이 다반사이거늘 우리는 이를 받아들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삶이 불편하고 삶이 삶처럼 여겨지지가 않는다. 그러하니 세상의 이치와 세상의 가치가 제대로 눈에 들어올 수가 없게 된다.
우리는 이때 쯤 해서 잠시 자신 주위를 둘러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도대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내가 이루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하면서 무엇을 위해 이리 서두르고 바삐 움직이며, 마구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어느 순간, 자신이 지켜보고 이룬 것들을 살펴보면서, 애는 쓰면서 열심히 살았으되 과연 의미 있었는지 더듬어 보았을 때, 그동안 내가 가슴에 담아두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가려가며 보고 듣고 이룬 것들이 갖는 의미에 대해 미처 담아내지 못했던 것들이 무수할 수도 있었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새삼 다시 돌아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 잡아보기도 해야 할 것이다.
(상략)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장석주, 「대추 한 알」)
장석주 시인은 이렇게 세상의 참 원리를 대추 한 알을 통해 읽어 낸다.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지도, 단 맛이 나는 것도 그래서 과일 취급을 받지도 못할 초라한 과일이지만, 이렇게 홀로 외로이 우주 한가운데서 세상의 모든 것을 견디며, 받아들이며, 살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세상과 통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가 받았던 시련들은 누군가에게는 절망이고 좌절이며, 또는 죽음이었을 것들이었는데, 대추는 그것들을 고스란히 맞닥뜨리고 받아들이고 견뎌내면서 스스로를 지켜 내었다. 나아가 세상과 통하여 이리 탐스럽고 맑게 빛나고 있다. 붉게 익은 대추를 보면서, 조물주가 세상에 내어 놓은 수많은 피조물 중에 크고 빛나는 것이 한 둘이 아닌데, 크고 멋지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도 참으로 많이도 만들어 내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석주는 이 하찮은 대추를 보며 세상과 통하고 있는 위대한 과업을 찾아내어 이리 관찰하며 담담한 어조로 원리를 읽어내며 감탄해 하고 있다.
다행이다. 이런 시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세상에 무엇 하나 쓸모없는 것이 없고, 이 땅의 창조물은 모두 다 쓸모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를 우리는 잘 알면서도, 실제로는 알고도 모른 척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머리로는 알겠는데 내 것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런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이중성과 모순과 배반과 어리석음을 느끼면서, 볼 것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는 것에 반성을 하게 된다. 나아가 이런 아름다움을 새삼 경험하면서 고맙고 기쁘게 생각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