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26. 알랭드 보통, “여행의 기술"
얼핏 “여행의 기술”이라 하니, ‘craft’의 그 "기술"이 떠올랐다. 여행에도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싶었는데, 한편 내가 성급하게 '1차적인 반응을 내 보인건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꽤 유명한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의 이 책을 펼쳐들었다. 그저 여행이란 어디론가 떠나 있다가 오는, 잠시의 휴식이거나 '기분의 전환'정도의 시간적 여유로 생각하는 수준인 내게 그 이상의 여행에 대한 담론이 필요한가 싶었다. 그러나 실은 여행이란 심오하며 꽤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는 삶의 또 다른 여정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하였다.
언젠가부터 여행이니, 어딘가로 떠난다느니 하는 생각이나 행동이, 현재 나를 구속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쉽게 용인되지 못하고 있고, 그리고 지금은 여행이 내가 풀어내야 할 과업 중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중이다. 따라서 미뤄 둬야 하거나 나와는 거리距離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나는 내가 정해놓은 선을 넘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일부러 무관심하거나 다른 영역의 무언가로 제쳐 놓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의 습관적인 삶의 방식이 나를 정형화 하듯 굳혀 놓으니 이전에 내가 정한 그 생각이나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며 그나마 자연스러워진 상태가 되었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 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철학적 문제들, 즉 실용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고를 요구하는 쟁점들이
제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기대에 대하여」, p18
그는 말한다. “여행은 장소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행을 가야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한 것을 미리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행의 기술이란 간단하거나 사소한 것이 아닌 수많은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는 것에 대한 것이므로 단지 여행 장소를 추천받고 결정하는 것으로 여행에 대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우리는 어딘가 미지의 곳에 대해 누군가로부터 '아주 멋지고 환상적이었다'라고 들으면 그런 곳에 가보고 싶어 한다. 이렇듯 우리가 보통 여행을 하려하면 여행지를 정하는 것으로 최선의 준비와 결정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들은 다소는 예상하고 있지만 경험하면서 얻어가는 미래의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 대다수의 여행객들이 하는 방식이다.
이런 일반의 방식에 "알랭 드 보통"은 조금은 다르게 시선을 돌리거나 순서를 뒤바꾸어 여행을 바라본다. 곧 여행의 총체적 과정을 완성한 후에 알게 되는 전부의 여행에 대해, 다시 그것을 해체한 후 생각의 구조를 바꾸듯 각 부분들의 조각을 다시 꿰맞추려는 듯이 헤집어 바라보고자 한다. 결국 같은 것이고 하나의 틀에 담긴 것들이며 그 틀은 그대로 인데, 무슨 차이가 그리 있는 것인가 싶다. 그러나 그게 아닌 듯하다.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과 심도가 다르며, 일단 여행자가 단단히 평소와 다르니, 그저 쓱ssg하고 잠시 현실을 떠나 있다가 오거나 그래서 정신과 마음을 수그리고 풀어주고 쉬어주려는 위로와 ‘베품’의 기회가 아니라는, 잔잔하지만 강한 어조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리 피곤할 일이 있나 싶다. 그저 내 주류의 삶에서 나의 모든 것이 있고, 여기에서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데, 잠시 충전도 할 겸, 완충작용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내 삶을 활기 있게 하기 위하여 다녀오면 되는 것을, 무슨 순서를 이리 바꾸어 놓는단 말인가 하고 항변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일단 틀렸다고 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알랭'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였다. 그도 작정을 하고, 수없는 사람들이 수많은 세월동안 느끼고 다듬고 정리한 생각에 대해 도전하듯 세상에 자신의 뜻을 전하고 있을 때에는 무언가 있지 않은가 싶기 때문에, 그리고 비록 허튼 소리라 해도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제각각 소중하고 가치 있는 법이므로 신이 창조한 것을 대신 다루는 것이니 누구도 이것에 대해 토를 달거나 반대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알랭'이 사막을 오랫동안 몹시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그는, "미국 서부를 찍은 사진("황무지를 가로질러 바람에 나부끼는 회전초 조각들"ㅡ‘나는 이 사진들을 확인할 수 없다. 아마 구경조차 못했거나, 얼핏 보았을 지도 모르지만’*저자 주)이나 모하비, 칼라하리, 타클라마칸, 고비 같은 사막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끌린다" 고 하였다. 그리고는 시나이 사막을 돌아다니기 위해 이스라엘의 에일라트 휴양지로 가는 전세 비행기를 탔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가 경험한 사막은 어떠했을까? '생명이 없는 골짜기, 나무와 풀, 물과 짐승이 없는 골짜기'에 이르러, 그가 목격한 것은 베두인족이 이름붙인 "방랑의 사막"이라는 분지는 시나이 남부의 높은 고원지대로 부터 이어진 곳이고 출발은 벌거벗은 산들이 몰려있는 산맥의 한 줄기였다. 이곳에서 ‘인간은 결국 세상을 위한 고뇌어린 자신의 생각을 창의적이라는 방식으로 새삼 별거 아닌 것처럼 별로 의식하지 않으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작은 충격일지라도 각성하게 할 메시지를 주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알랭은 자신의 여행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결국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은 자신의 여행에 대한 기록일 뿐이기도 하고, 새로운 여행에 대한 관점을 언급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는 여행을 통해 어떤 장소에서 전과 다른, 아니면 남들과 다른 통찰을 경험할 수도 있다고 의도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즉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는 그의 메시지를 통해 여행의 심도를 느끼도록 제안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것도 결국은 내공이 쌓인 사람에게나 알 수 있게 되거나 보일 ‘정교하고 세련된 발견’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세상의 쓸모거리가 그 원천에만 국한하지 않듯, 여러 부문에서 그것들을 지켜보고 다듬고 나아가 애정을 쏟으면 마치 생명을 얻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갖듯이, 전과는 다른 안목과 경험을 쌓게 되어 새로운 생을 사는 듯한 기분에 빠지게 되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