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Oct 11. 2021

[내가 사랑하는 드라마] 인간실격 - 중간 리뷰 2

11-12부를 보고

1. 인간실격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늘 피곤과 고단함이 가득 묻어 있다. 특히 여성들은 하늘 아래 마음 편히 누울 곳 하나 온전히 갖지 못한 것처럼 안쓰럽고, 그녀들을 바라보는 이들 곁에서 비로소 잠시 - 그리고 몰래 - 쉬어간다. 민정은 피시방에서 오랫동안 지냈고 딱이는 민정이 덮을 깨끗한 이불을 챙겨 온다. 경은은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정수의 차에 와서야 잠시 눈을 붙인다. 아란은 촬영장 한 구석에 주차한 종훈의 차 혹은 종훈이 운영하는 아키라에 와서 잠을 잔다. 부정은 가장 편안해야 할 집에서도 늘 부엌 옆 구석진 방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있곤 했는데, ‘쉼’이라는 이름의 모텔에서 강재와 함께 귤을 까먹고 누워서 정말 곤히 잠든다. 11부에서 산자락의 매서운 새벽바람을 막아주는 작고 노란 텐트 안에서 부정은 잠시 누울 수 있었고, 강재는 살며시 그녀의 발에 담요를 덮어준다.


2. 아주 가까이 있다 해도 시선이 닿지 않는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한 집에 살고 있어도,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에도, 정수는 부정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인지 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부정은 정수에게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투명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길에서 만나는 낯선 얼굴의 사람들만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강재가 6부에서 순규와 우남과 함께 아침을 먹으며 했던 말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투명인간처럼 - 보여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더 슬프고 외로운 일이다.


반면에 누군가의 사소한 말과 행동을 찬찬히 잘 살피게 될 때, 그리고 그 사소한 어떤 것이 나의 마음에 남아 걱정이나 궁금함이 생겨날 때 그 사람은 나에게 이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가 된다. 목덜미 근처에 살짝 풀린 블라우스의 단추라든가 올이 나간 스타킹과 같은 것들에 시선이 닿고, 그것 때문에 혹시나 하는 걱정을 엘리베이터에서 조심스럽게 전하게 되는 ‘아는 여자’는 그냥 ‘아는 여자’ 일 수 없다. 그녀에게 피해가 갈까 억지로 연락처를 지우고 머리를 자르고 몇 달을 두문불출하는 마음, 몇 달 뒤 그녀의 메시지에 갑자기 뜬금없는 먼 곳의 파출소까지 달려가게 하는 마음. 강재의 시선과 마음이 닿는 부정은 고유한 빛이 나는, 누구와도 다른 인간이다. 무엇이 되지 않았더라도, 무엇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냥 존재만으로 눈에 띄는.


그리고 그런 시선과 마음을 서로가 주고받는 순간이 흔치 않다는 것을 부정은 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떤 조건과 상황에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 자세히 바라보고 궁금해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흔치 않지만, 그런 마음이 두 인간 사이에 동시에 일어나고 교차하는 순간은 정말 흔치 않아 마법 같다. 그렇지만 부정은 손가락에서 차갑게 빛나는 반지처럼 그녀의 삶을 단단히 잡고 있는 관계와 책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가장 심장이 두근거리는 순간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산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여정의 갈림길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기를 택한다. 그리고 마법에서 깨어난 신데렐라처럼 그녀는 버스에 혼자 앉아 눈물을 흘린다. 금지된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눈물이 된다.


3. 서로가 서로에게 시선과 마음이 닿을 때 우리는 문득 확인하고 싶다. 너의 시선과 마음은 어떤 빛깔이며 얼마만큼의 크기인지. 십 대 소년소녀 첫사랑이 아니니 무조건 직진하거나 표현하기에는 생각할 것도 조심할 것도 너무 많다. 특히 내가 상대의 시선과 마음을 오해하고 혼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고, 그래서 조심스러움으로 단단히 무장한 확인은 때로 오해나 상처를 만들기도 한다. 파출소를 나와 부정이 강재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그래서 조마조마하다. 이렇게도 공을 던져보고 저렇게도 공을 던져본다.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는 더 조심스럽다. 고등학생 때는 순수했었던, 하지만 이제 상대가 수제비 뜨듯 나를 간 보는 것도 쉽게 눈치채는 강재는 부정이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읽고 입꼬리에 살짝 미소가 비어져 나온다. 그러나 조심스럽다. 나의 상황, 그녀의 상황, 그리고 어쩌면 내가 오해하고 혼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움까지. 그래서 답을 하기 어렵다.


그러다 ‘얼마 드리면 돼요’라는 직구를 가장한 엄청난 속도의 변화구가 날아오고, 그 변화구에 강재는 순간 아슬아슬한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균형을 잃고 난 다음, 강재와 부정의 선택은 마음을 겹겹이 둘러싼 조심스러움의 방어막을 걷어내고 한 줄 한 줄 조곤조곤 마음속의 생각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솔직해지기 위한 용기를 낸 그 순간부터 요정의 지팡이가 움직여 신데렐라의 호박마차 같은 - 짧은 꿈이 시작된 셈이다.


4. 11부와 12부에서도 카메라는 신발과 발을 자주 비춘다. 부정의 아버지 창숙과 정수의 어머니 민자가 물이 고여있는 진흙탕에 미끄러져 신발과 발이 젖고 더러워지는 장면이라든가, 산길을 걷는 부정의 구두와 발을 바라보는 강재의 시선이라든가, 텐트 밖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부정과 강재의 신발.


5. 무엇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길에서 이탈하게 된, 그래서 아무것도 되지 못한 43살의 여자. 엄청나게 큰 꿈을 꾼 것도 아니고, 열심히 살았고, 차곡차곡 무엇인가 쌓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을 잃고 한 때 내 것이라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린 채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 부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슷한 삶의 경험이 필요하다. 정상이라고 보는 궤도를 달린 경험과 그 궤도에서 이탈한 경험, 그리고 40대라는 - 무엇인가 다시 시작하기에는 쉽지 않은 나이.


6. 12부의 마지막, 강재는 터미널에 남겨진 유실물처럼 쓸쓸하게 남았다. 가슴에 시냇물 소리가 졸졸 나는 것처럼,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한없이 외로운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버스를 타고 떠나는 부정을 향해 해사하게 미소 짓는 강재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나서 우리는 울거나 후회하곤 하지만, 너무 늦지 않게 온다면 유실물 코너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사랑하는 드라마] 인간실격 - 중간 리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