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학교를 다닌 여학생이라… 80년대 순정만화에서나 볼 법한 그런 설정이 나의 고등학교 생활이었다. 물론 현실은 순정만화처럼 아름답지도, 단면적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규모가 큰 남고의 작은 국제과정에 다녔다. 공식적으로 우리 프로그램은 12반이었지만 수업도 생활도 따로 했다. 산에 있던 학교 맨 꼭대기에 있는 옛 남고 기숙사가 교실로, 여학생 기숙사로, 도서관으로 탈바꿈하여 우리의 생활 반경이 되었다. 수업만 따로 들었지 우리는 남고와 부딪힐 일이 많았다. 급식실, 운동장, 체육관, 매점, 보건실 등을 모두 공유했고 매년 있는 체육대회와 축제, 그리고 입학식과 졸업식 또한 함께 진행했다. 몇백 명의 남학생 속에 있는 40명 남짓의 여학생. 가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신기해하며 모든 관심을 받아서 좋았겠다는 말은 던지곤 한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젓는다. 결코 녹록한 삶이 아니었기에. 언제나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여자라는 이유로, 국제과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느낀 남고의 몇몇 학생들은 우리에게 은연중에 불만을 토로했다. 급식실이나, 체육관, 그리고 보건실에 갈 때마다 들려오던 크고 작은 성희롱, 인신공격, 비웃음 등… 이를 알면서도 증거를 잡을 수 없었던 우리는 쉽게 신고를 할 수 없었고, 슬쩍 선생님들께 말을 꺼낼 때면 “에휴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너희가 무시하고 넘겨라.”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또한 우리도 당당히 그 학교 학생인데 무엇이든 남고 위주로 되어있는 곳에서 우리는 그 시설들을 빌려 쓰는 느낌이었다. 우리들의 주 생활관인 곳을 벗어나면 항상 조심해야 했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정기 외박을 할 때나 방과 후 시간에 짧은 반바지나 민소매를 입고 다니면 남고 선생님들에게 꼭 핀잔을 들었다.
“옷이 이게 뭐니.” “남고 애들이 공부에 집중을 못하잖니.” “남자 애들 꼬실 생각 하지 말고 단정히 하고 다녀라.”
그리 노출이 심한 옷이 아니더라도 항상 조심해야 했고, 저절로 따라오는 시선이 싫어 몸을 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가 무서워 그렇게 조심하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회에서 소수인 집단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스템 안에 어쩌다 보니 끼워져 있는 걸리적거리는 돌멩이 같은 느낌. 힘도 자리도 없었고, 목소리 또한 크지 않았다.
그 전에도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한 번도 내 정체성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듯 그냥 자연스럽게 이렇게 구분되었을 뿐. 반면 남고에서 생활하는 동안 난 항상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극도로 자각하고 다녔다. 날 정의하는 다양한 요소들 중 가장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성별이었고, 교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나는 여자니까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어디를 가든지 나와 내 친구들은 눈에 띄었고, 시선을, 가끔은 눈엣가시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