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흐름 Dec 11. 2021

회복의 힘

상담 수련 일기

이번 학기 사례관리 수업이 좋은 이유 중에 하나는, 슈퍼비전 사례에 대해 수강생이 자기 나름의 사례개념화를 작성하고 과제로 제출하여 이에 대해 교수님으로부터 개인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담 수련을 하면서 외적인 보상(=돈)은 물론이거니와 내적인 보상(=칭찬) 또한 받기가 어려운데, 이 수업에서는 각 수강생이 사례개념화한 내용에서 타당하다고 느껴질 만한 지점이 무엇인지, 어떤 점이 더 보완되어야 하는지를 상세히 피드백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못한 부분만 주구장창 피드백받는 게 아니고, 잘 짚은 부분에 대해서도 피드백받을 수 있는 게 정말 좋다. 부족한 지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부분이 보완되면 더 좋은 의견을 낼 수 있을지 방향성을 알 수 있어서 더 좋고.


여러 피드백 중에서도, 다음 주 슈퍼비전 사례에 대한 과제에서의 피드백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내담자의 자기 및 대인관계 표상이 좋다/나쁘다의 차원으로만 이분화되어있는 것 같다'라는 아이디어에, 교수님께서는 '관계가 좋았다가 나빠지기도 하고, 다시 복구가 되기도 하는, 그런 다양한 경험들을 안전한 가운데 자연스럽게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피드백을 주셨다.


이 피드백이 참 많이 공감이 되었다. 사실 이 사례랑 관련하여 공감이 되었다기보다는 내 개인적 경험과 관련하여 공감이 많이 되었다. 나 또한 나에 대한 표상, 그리고 관계에 대한 표상이 이분화되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그런 것 같다).

내담자로서 상담을 받으면서, 그리고 동시에 상담자로서 상담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점 중 하나는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관계는 없다'는 것이었다. 대학원에 오기 전의 나는,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동생한테는 도움 되는 누나, 누군가한테는 이해 잘해주는 친구, 지도교수님께는 가장 아끼는 지도 학생이 되고 싶었고, 그런 모습으로만 관계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만 관계 맺는 건 너무 숨 막히는 일 아닌가...그리고 뭔가 느끼하다. 모든 사람은 각기 자신만의 고유함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 자신이 아주 비슷하다고 느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존재일 텐데 상대가 나랑 달라서 맘에 안 드는 지점이 몇 가닥은 있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좋기만 하거나 싫기만 한 관계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누군가와의 관계를 좋게만 보거나 혹은 나쁘게만 봤던 이유는, 교수님께서 이번에 피드백해주셨던 것처럼 '관계가 좋았다가 나빠지기도 하고, 그랬다가 다시 복구가 되기도 하는' 그런 자연스러운 경험이 부족해서였던 것 같다. 조금 더 정확히는 '좋았던 관계가 틀어졌을 때, 이를 회복해보았던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경험이 부족하니까, '관계가 한 번 나빠지면 복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에 자리 잡았던 것 같고, 그래서 관계가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좋은 모습만을 유지하려 애썼던 것 같다. 그리고 한 번 관계가 나빠지면, '어차피 복구할 수 없는 관계다, 망했다.'라고 생각하며 그 관계를 포기해버리고 '안 좋은 관계'로만 이름 붙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걸 안다. 누군가한테 무한한 애정을 느꼈다가 한 순간에 짜게 식기도 하고, 그 때문에 상처를 받았더라도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화해해서 복구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해보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의 상담 사례를 보면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너의 어떠어떠한 말과 행동이 맘에 안 든다, 화가 난다."와 같은 말이 오고 가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 도움이 되는 일인 것 같다. (물론 이런 부정적인 말만 오가면,,, 그것도 문제겠지만,,,) 상대에게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가, 맘에 안 들면 공격하기도 하고, 그 공격에 너무 상처 받았다 싶으면 사과하면서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여러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자신과 관계에 대한 균형적인 그림을 그리게 해 줄 테니까.

물론 이걸 알게 된 지금도 부정적인 마음을 실제로 표현하는 것엔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다. 상담받을 때 정말 많이 느낀다. 나는 고집도 정말 세고 자기 주관이 강한 편이라 한 번 수틀리면 짜증이 확 올라온다. 상담해주시는 선생님과 대화할 때도 그런 걸 느낀 적이 정말 많았는데, 한 번도 표현을 못했다. 표현을 한다고만 생각하면 막연한 불안감, 무서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올라와서 차라리 표현을 안 하는 편을 선택한다.


지난주 상담에서는 이 주제에 대해 선생님께서 직접 언급을 하셨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한테 자기 마음에 따라 Yes/No 표현을 잘 못하는 것처럼, 나한테도 그런 게 있어요? 흐름 씨가 보기에 나는 어떤 사람이에요?"라고 여쭤보셔서, "반반이에요. 어쩔 땐 정말 안전한 사람인데, 어쩔 때는 온몸에 긴장이 될 정도로 불편하고 위험하다고 느껴요."라고 대답을 했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내담자들은 나를 죽이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상담 때려치우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어쩔 땐 자기가 죽어버리고 싶다고도 하는데. 물론 그건 진짜 그렇게 해버리겠다라는 걸 말하는 진심이라기보다는 그 순간의 솔직한 느낌, 감정이구요. 아무튼 그 사람들 그렇게 말하고 또 괜찮아져요. 본인이 돈 내고 받는 상담인데 뭔들 말하면 안 되는 게 어딨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상담 관계에서 자신이 나를 존중하고 위하는 것은 그냥 디폴트라고, 이 상담 관계를 연습의 장으로 삼아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안심이 많이 됐다. 선생님을 죽이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지만, 당신이 무슨 상담자냐,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고 이거다, 왜 그걸 모르냐,라고 짜증내고 화내고 싶었던 적은 많았다. 그런 걸 내가 선생님께 얘기하면, 선생님이 너무 상처 받을 것 같은데, 그 상처 받은 마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죄책감을 느낄 자신이 없어서) 끝내 말을 못 한 거였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그렇게 얘기를 해주시니, 내가 선생님을 공격하더라도 선생님이 (상징적인 의미에서) 죽지 않겠구나, 그 정도로 약한 사람은 아니구나. 그렇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솔직한 마음을 얘기해볼 수 있겠다,라고 잠깐이나마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전히 너무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시도해봐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해보아도 괜찮겠다는 조금의 안심감을 느꼈다.


상담에서의 변화는 [탐색 - 통찰 - 실행]의 세 단계를 거친다고 들었다. 개인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통찰하는 것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 통찰을 토대로 변화를 실행하는 것은 더더욱 오래 걸린다고 했으니,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했으니... 통찰과 실행 그 사이 어딘가의 자리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표현해야 할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실행력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