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은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집 앞에 서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의 끝자락, 하늘은 차가운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흩어져 가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유진과 정민, 그리고 빈 자리에 놓인 작은 향로뿐이었다.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신, 유진은 자꾸만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다른 생각에 가슴이 무거웠다.
“할머니는 이제 편안히 가셨겠지...”
유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향로를 한 번 더 바라봤다. 할머니는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어머니가 떠난 후, 할머니는 유진을 키워주었고, 그 모든 사랑을 유진에게 쏟았다. 하지만 그리운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곁에 없었다.
정민이 조용히 다가왔다.
"너 정말 갈거야?"
유진은 고개를 돌려 정민을 보았다. 가벼운 트레이닝복에 패딩점퍼를 걸친 일상복 차림의 정민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 보았다.
"응, 그냥 잘 사는지만 보고 올거야."
정민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유진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유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 말이야. 어쩌면 결혼해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 존재가 불편해질 수도 있고..."
유진의 목소리는 왠지 쓸쓸하고 처연했다.
정민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릴 적 유진은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잦은 다툼 끝에 집을 떠났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떠난 자세한 이유를 할머니는 알려주지 않았기에 유진은 이제 그 이유가 알고 싶어졌다. 어머니가 떠난 이유도 알고 싶었고, 어디선가 잘 살고 있다는 안도감도 느끼고 싶었고, 혹시 만나서 반갑게 포옹이라도 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하고는 정민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정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가 떠난 후, 그녀는 항상 할머니에게 의지하며 살았고, 그 누구보다 할머니를 사랑했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늘 마음속에 큰 구멍처럼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건 그 어디에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싶어."
유진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엄마도 어쩌면 내가 보고싶은데... 아빠가 돌아가신줄 모르고 집에 오지 못했을지도..."
정민은 한숨을 쉬었다.
유진이 걱정되었지만 유진의 결정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어릴 적부터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억력이 뛰어나서 한 번 본 것, 한 번 들은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조차 생생하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행복하고 그리운 기억. 어쩌면 그 기억으로 지금껏 버텨 왔을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떠났던 그날, 유진은 아직도 그 장면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심해, 유진아. 그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어. 어머니를 찾는 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닐 거야."
유진은 정민을 바라보았다.
"그건 알지만, 이제 더 이상은 모른 채 살 수 없어. 나의 과거와 어머니의 진실을 알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정민은 유진의 결심을 막을 수도, 그녀를 무작정 떠나보낼 수도 없었다.
"그럼, 내가 도와줄게. 네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내가 항상 곁에 있을 거야."
유진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정민아. 하지만 이제는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머니의 흔적을 쫓다 보면, 언젠가 찾겠지."
정민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만 갈게.”
“응. 무슨일 있으면 반드시 연락해야 돼, 알았지?”
“응.”
정민은 돌아서서 걸어가는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과 옷깃을 흩날릴 정도의 바람이 그들 사이로 지나갔다.